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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빗, 고운 사람을 만들다.

전남무형문화재 15호_ 담양 참빗장 고행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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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곱게 매만지던 참빗의 역사 

우리나라 빗의 역사는 기원전 1세기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낙랑고분에서 출토된 것을 가장 이른 시기로 본다. 한편, 참빗의 시작은 조선 시대 관아에 속해 참빗을 만들던 죽소장(竹梳匠)을 그 출발점으로 삼는다. 대나무로 만든 빗살이 촘촘한 머리빗인 참빗은 크기에 따라 대 소ㆍ 중소ㆍ어중소ㆍ진양소ㆍ화각소ㆍ써울치 등으로 나뉜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의 영향으로 여인들에게 부덕을 강조하는 엄격한 가부장제의 분위기가 사회를 뒤덮었다. 여인들은 장신구를 통해 자신의 몸치장을 하는 데 제한을 받았다. 또한 여러 가지 이유로 복식은 빛깔에서부터 엄격히 구분 지어졌고, 혼례 때가 아니면 일반 아녀자들은 아름답게 자신을 꾸미는 일에 타인의 눈을 의식해야 했다. 이러한 제약 속에서 상고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다양한 장신구, 팔찌, 귀걸이, 목걸이 등은 자연스레 자취를 감춘다. 하지만 여전히 아름다워지고자 하는 여인들의 열망은 살아남아 다양한 머리 장신구를 탄생시켰다. 부와 권력, 사회적 지위를 상징하는 조선시대 여성들의 머리 장신구. 여인들의 순수하고 화려한 욕망을 더욱 빛나게 했던 그 이면에는 작고 소박한 참빗이 있었다. 

참빗은 과거 여인들이 곱게 얼굴을 단장할 때 마지막에 가서 입술을 붉게 물들이는 연지처럼 머리단장을 마무리하는데 쓰였다. 성긴 얼레빗으로 빗어 내린 머리칼을 가지런히 정리하는데 사용했다. 예로부터 영암, 담양, 나주, 남원 등지에서 만들어졌지만, 이제는 담양에만 그 명맥이 남아 있다. 전남무형문화재 15호 참빗장 고행주 선생. 그는 대나무골 담양의 청량한 기운을 담아 작지만 소중한 참빗의 역사를 지켜내고 있다. 

참빗 만드는 일은 언제부터 시작하셨죠? 

열 살 때부터 시작했으니 상당히 오래 됐습니다. 70년 가까이 됐어요. 

듣자하니 아버님께 배우셨다면서요. 

네. 참빗은 가업을 이어오는 작업이에요. 증조할아버지, 아버지, 나, 우리 아들로 이어오고 있죠. 다른 일은 하지 않고 외길로만 참빗을 만들어 왔어요. 내가 4대, 우리 아들이 5대, 손자가 있으니까 앞으로 6대가 되겠죠. 아들딸이 8명인데 그중에서 큰 아들이 참빗 만드는 일을 배우고 있어요. 나는 전통 참빗을 만들고 우리 아들은 현대판 얼레빗을 만들고 있어요. 

최근에도 아드님이 와서 아버지께 참빗 만드는 걸 배우시나요? 아드님께서도 아주 어려서부터 보고 배웠을 것 같은데. 

가내 수공업이라 내가 우리 아버지께 배운 데로 아들도 내게서 배웠죠. 이 일은 엄하게 가르칠 필요가 없어요. 눈썰미로 하니까요. 아들은 손재주가 있어서 스스로 잘 느끼고 만들어요. 

참빗 만드는 일은 처음에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어요? 

국민학교 때 아버지 심부름을 다니면서. 왜 어깨 너머로 배운다는 말이 있잖습니까. 아버지가 일하다가 자리를 뜨시면 그 자리에 앉아 그대로 흉내도 내 보고. 그렇게 해서 배운 거예요. 어렸을 때는 철이 없어 가업을 잇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아버지 어깨 너머로 쭉 재미삼아 배우다보니까 이렇게 외길로 오게 된 거죠. 참빗은 마진이 적어서 그렇지 천한 직업은 아니에요. 하나의 작품을 만드는 거죠. 너비와 길이를 정확히 재서 만들어요. 세심하고 꼼꼼 해야 되죠. 

집안의 가업이라서 이어간다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쉽지 않은 일인데요. 

어느 날 무형문화재로 지정받는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증조 때부터 쭉 가업으로 내려온 일이라 내 대에 와서 끊기면 조상님들께 잘못하는 거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제 참빗은 현대판 물결에는 안 맞아요. 옛것이 돼서. 만약에 우리 가문이 손을 뗀다면 지구상에서 참빗이 없어지는 거 아니겠어요? 돈 잘 버는 사람이나 적게 버는 사람이나 많이 벌어서 행복한 건 아니거든요. 먹고 살아야하니까 살지만, 부자들처럼 멋지게 놀지는 못하지만, 조상님들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것을 내 대에서 끊기도록 놔두면 가문에 욕이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가업을 잇다보니 어느 날 무형문화재로 지정이 됐죠. 앞으로도 어디서 계속 하라고 시키지 않아도 우리 아들한테, 또 손자한테 전해줄 계획이에요. 

참빗만 만들어서 생계를 유지하는데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여러 가지 직업을 병행하면 살기가 편하겠죠. 하지만 참빗은 가업으로 쭉 내려온 일이라 이일 저일 전전하진 않았어요. 그렇기 때문에 아무래도 살기가 고단하죠. 허나 다른 일과 병행한다면 가업을 이어 나온 정신이 흐트러지니까 살기는 어려워도 꾸준히 지켜 나왔죠. 

아내 분에게 고맙지 않으세요? 이제껏 함께 참빗을 만들어오셨는데. 

고맙기 이전에 고생스럽게 살게 해서 미안할 따름이죠. 애를 써도 돈을 적게 버니까요. 

최근에는 참빗을 찾는 이들이 어느 정도나 되나요? 

옛날에는 잘 팔렸는데… 지금은 플라스틱 빗이 많이 등장해서 참빗이 잘 안팔려요. 30년 전만 해도 참빗조합이 생겨날 정도로 잘 팔렸어요. 조합이 있어서 몇 천개씩 도방으로 넘기면 중간상인이 내다팔았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옛날에 비해 10에 1할 정도나 팔릴까. 요즘은 전화로 어린애들 머리에 서캐(머릿니)가 생겼다고 연락이 와요. 우리 생각에는 시골 아이들에게서 잘 생길 것 같은데 오히려 도시에서 머릿니가 생겼다고 자주 연락이 와요. 가끔씩 소장품으로 간직하려는 사람들이 전화로 문의를 하기도 해요. 나이 드신 분들 중에 머리가 가려운 분들도 오셔서 사가시고. 

한 달 평균 어느 정도로 팔렸나요? 참빗조합이 있던 시절엔. 

옛날엔 지금 화폐가치로 계산한다면… 잘 팔리던 시기에는 거의 200만 원 이상 팔렸을 거예요. 개수로는 1500개, 2000개. 가격이 딱 정해진 게 아니라, 사러온 사람이 많고 작고에 따라 들쑥날쑥했죠. 

당시 참빗은 어느 지역으로 팔려갔나요? 

주로 서울, 부산, 대구, 인천. 각 도시마다 큰 잡화상이 있었거든요. 그런 곳에서 우리한테서 참빗을 사다가 도붓장수들이라고 있어요. 채반에 바늘이며 고무줄 같은 걸 놓고 파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중간 잡화상에서 사다가 손님들한테 팔면서 소비를 시켰죠. 

참빗조합이 있었을 때 동네 풍경은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이 마을에는 농사짓는 땅이 별로 없었어요. 오면서 봤을 거예요. 곡식 심을 자리가 안 보이죠? 뒤에는 산으로 막혀 있고, 앞으로는 시내가 흐르고. 농사를 짓기 어려우니까 참빗을 만들면서 살았죠. 

참빗조합이 있을 당시 동네 분들이 모두 참빗을 만들었나요? 

주변에서 말을 들어보면 일본 같은 곳은 1품목으로 분업이 되어 있다고 그러더군요. 우리 담양은 수백 년 전부터 마을마다 1품목으로 전문화가 되어 있었어요. 우리 마을을 찾는 외지 분들은 요즘도 대바구니, 부채, 죽부인을 사겠다고 가져오라고 해요. 대나무로 공예를 하니까 이것저것 전부 만들지 않느냐는 거죠. 하지만 그게 아니에요. 우리 마을 향교리는 참빗, 어느 마을은 대바구니, 어느 마을은 죽부인… 그렇게 나눠져 있어요. 그런데 행정을 보시는 분들은 그런 사정을 잘 몰라서 지금껏 마을의 특성을 살리지 못한 것 같아요. 지금도 그래요. 참빗 만드는 고행주한테 부채 가져 오라고 하는 분도 있어요. 

한 동네에서 같이 참빗을 만들다가 한 집 두 집 그만 둘 때는 외롭다는 생각 안 하셨어요? 

외롭긴 외롭죠… 참빗이 한창 전성기이던 시절은 일제 시대였는데, 그때는 우리 마을이 100호 쯤 됐어요. 지금은 45호도 안돼요. 참빗 만드는 사람들 이 세상을 뜨고 나니 후세들은 참빗을 안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점점 참빗 만드는 이들이 줄어들었죠. 참빗 만들던 사람들이 다 사라지고 몇몇만 남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일을 하고 싶단 생각은 안 했어요. 

그렇게 이 일이 천직이라고 생각하신 건 무엇 때문이신지. 

이런 말이 있죠? 최씨들이 고집 있다고. 우리 고씨도 한 고집 하거든요. 가업으로 이어왔으니 나 역시 한 번 고집을 부려보자 해서 지금까지 이어온 거죠. 다른 재주는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참빗 만든 지 이제 65년도 넘었어요. 내가 지금 여든 살이니까. 

요즘은 수녀원에서도 참빗을 찾는다면서요? 참빗을 구입하는 사람들과 얽힌 재미난 이야기는 없으세요? 

지금은 참빗이 잘 안 팔리니까 재미나고 재미없고가 잘 안 느껴져요. 옛날 참빗조합이 있고 시장이 형성됐을 때는 참빗을 천 개, 이천 개씩 만들어 팔았어요. 지금은 자동차가 있지만 당시에는 참빗 더미를 등에 지고 나가서 팔았거든요. 다 못 팔고 집으로 돌아오면 살기가 어려우니까 이런저런 어려움이 많았죠. 지금은 찾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 특별하게 떠오르는 재미난 이야깃거리가 없네요. 

참빗을 만들려는 사람은 가끔씩 찾아오나요? 

예술적인 감각을 지닌 사람들은 간혹 찾아와서 배우고 싶어 해요. 하지만 이 일을 하려면 먹고사는 데 어느 정도 지장은 없어야 해요. 배우고 싶은 의욕은 있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있으면 배우러 왔다가도 도로 가버려요. 

영암 쪽에도 참빗 만드는 분이 계셨던 걸로 아는데, 서로 아는 사이신지. 

네, 잘 알죠. 이식우 씨하고 나는 1986년 11월 13일, 그러니까 26~27년 정도 됩니다. 그날 전라남도에서 우리를 무형문화재로 지정한다고 해서 같이 갔어요. 그 분도 참빗장 15호, 나도 15호. 결론적으로 참빗은 같은데 영암과 담양에서 각각 참빗을 만드는 기법은 좀 다릅니다. 문화재청에서는 참빗을 양쪽에서 만드니까 무형문화재로 함께 지정한 거죠. 

영암 참빗과 담양 참빗은 어떻게 다른가요? 

결론은 빗은 빗이죠. 그런데 만드는 과정이 달라요. 예를 들어 참빗을 제작 하는 기구 명칭도 다르고. 만드는 순서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우리는 대나무를 쪼개서 3-4센티로 전부 쪽을 놓아가지고 작업을 하는데 영암에서는 쪽을 안 놓고 통으로 있는 것을 그대로 껍질을 벗겨내죠. 완성될 때는 똑같지. 만드는 과정이 다를 뿐이지. 

참빗이 서캐를 없애기도 하지만 아주 먼 옛날엔 시집갈 때 혼수품으로 가져 갔다는데 당시 참빗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옛날엔 꼭 머릿니를 잡는 데만 참빗을 쓰는 게 아니었어요. 사람이란 미를 숭상하는 동물인지라 머리를 정갈하게 하는데 관심이 많죠. 참빗이 있기 전 옛 사람들은 다섯 손가락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빗어 내리면 고작이었어요. 참빗은 사실 머리를 곱게 치장하려고 고안해낸 거예요. 옛날 궁중에서 썼다 는 이야기도 있어요. 또 잘 사는 집에서는 딸이 시집갈 때 참빗을 혼수품으 로 50개, 100개 사서 넣어줬다는 얘기도 있고요. 참빗을 누가 만들었다는 역사적인 기록은 없어요. 어느 땐가 빗에서 벌레가 나와서 그 벌레를 머릿니라고 불렀죠. 그때부터 참빗은 머릿니 잡는 빗이 되어 버린 거예요. 애당초 머리를 곱게 빗기 위해서 만든 것인데 말이죠. 

최근엔 참빗을 머리 빗는데 사용하기보다는 소장하려는 이들이 더 많을 것 같아요. 얼레빗이라고 하나요? 예쁘장하게 생긴 성긴 빗 있죠? 

예전에는 흐트러진 머리를 참빗으로 빗으려면 빗살이 빽빽해서 잘 안 빗어졌어요. 얼레빗은 성글성글 해서 얼레빗이거든요. 그래서 얼레빗으로 먼저 빗고 참빗으로는 마지막에 동백기름을 발라 고운 자태를 가꿨죠. 요즘은 대나무로도 얼레빗을 고안해서 애호가들에게 판매하고 있어요. 옛날 전통 참빗은 나이가 드신 분들이 많이 찾고, 현대 감각에 맞춘 얼레빗은 젊은 층에서 많이 찾아요. 

참빗을 만드는데 사용하는 대나무는 어디서 가져오나요? 

담양은 예로부터 대나무시장 규모가 커요. 그런 곳을 찾아가서 필요한 대나무를 구입해옵니다. 대나무하면 종류가 수십 종이 있어도 참빗이나 바구니 만드는 데는 왕대가 최고에요. 우리 참빗은 3년 된 왕대를 주재료로 씁니다. 대나무가 3년 이상 자라면 질기고 윤기가 없어요. 

듣자하니 참빗을 만들어서 직접 머리에 빗어보신다고 들었는데요. 

빗어봐야 머리가 잘 빗기는지 알 수 있잖아요. 참빗을 사러 오는 이들한 테도 마찬가지에요. 빗을 사기 전에 한 번씩 머리를 빗어보라고 하죠. 

최근에는 하루 혹은 일주일에 참빗을 몇 개나 만드세요? 

하루에 한 개를 못 만든다고 하거든요. 왜 그런가 하니 참빗 염색에만 6시간이 걸리고, 위에 등을 아교로 접착해서 건조시키는데 또 6시간에서 7시간이 걸려요. 이것저것 하면 잠자는 시간은 얼마 안돼요. 그래서 15일 만에 완성을 할 수 있도록 주문을 받아 단계별로 작업을 해서 500개를 만들어요. 

참빗 만드는 건 힘들지 않으세요? 

힘든 건 없어요. 기술로 만들어야 돼서 기술이 필요하지. 참빗 만드는 데는 재료가 간단하니까요. 여름에는 더우면 그늘로 가져가서 일하고, 겨울에는 추우면 따듯한 방에서 일하고. 그래서 작업여건은 괜찮은 편이에요. 

혹시 참빗 강의를 나가기도 하시나요? 

조그마한 회사나 단체에서 살아나온 역경같은 걸 들려달라고 해서 한 시간짜리 얘기는 하러 다녀요. 참빗 만드는 거 배우겠다는 데는 아직 없고. 

참빗 만들 때 아교를 칠해 빗살을 부쳐서 이불을 덮는다는데 아직도 따뜻한 아랫목은 참빗에게 내주시나요? 

옛날에는 살기가 궁해서 아궁이에 땔감을 떼잖아요. 그래서 초저녁에만 방이 따뜻하죠. 이불을 덮고 옹송그리면서 날 새기만 기다려요. 그런데 빗 만들 때는 빗은 따뜻한 아랫목에 두고 우리는 차디찬 윗목에서 자곤 했어요. (웃음) 

우리 참빗은 플라스틱 빗이나 서양 빗과 어떻게 다른지 자랑 좀 해주세요. 

참빗은 첫째, 재료 자체가 신선한 대나무에요. 대나무로 머리를 빗으면 정전기가 생기지 않아요. 모근에 참빗이 닿으면 참 시원해요. 플라스틱 빗으로 머릴 빗으면 느낌이 먹먹하거든요. 참빗의 특징은 화학재료가 전혀 안 들어간 100% 대나무로 만든다는 거예요. 

계절적으로는 어느 계절이 참빗 만들기에 좋나요? 

가을하고 겨울이 제일 좋아요. 가을, 겨울, 봄까지가 팔리기도 잘 팔리고. 여름에는 잘 안 팔려요. 참빗을 쓰고 나서는 종이에 말아서 보관하면 되요. 또 계절에 따라 좋은 대나무로 만든 참빗을 구입하면 습기도 먹지 않고 좀도 슬지 않아요. 

공간이 마련돼서 무형문화재를 꾸준히 소개된다면 전라남도에 대한 시선이 좀 더 긍정적으로 변할 것 같지 않으세요? 참빗을 비롯해 다양한 무형문화재를 소개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면요. 

위정자들은 앞에 보이는 것만 보지 문화란건 잘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아요. 화분에 시들어진 꽃을 보면 언제 이렇게 시들었냐하는 식이에요. 그래서 대를 이어 문화재를 전수하려는 사람들이 없는 거죠. 만약 그런 공간이 있다면 참빗 만드는 법을 사람들에게 많이 가르쳐 줄 수 있으니 정말 좋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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