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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심덕과 김우진의 그날 이후

남도이야기 사의 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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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이어질 이야기는 ‘가슴 아픈 사랑이야기’가 아닌 ‘정말 죽었을까’부터 시작됐지만 그 질문은 헛되었다. 진짜 중요한 것은 ‘정말 죽었을까’가 아닌 ‘그들이 누구인가’였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바른 질문 갖기까지의 과정이다.

현해탄에서 멈춘 그들의 시간

윤심덕과 김우진은 1926년 8월 2일 새벽 4시경 부산으로 향하던 관부선 ‘덕수환’에서 동반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신문에는 ‘유부남과 처녀의 사랑, 비극적 결말’, ‘현해탄 격랑중에 청춘남녀 정사. 극작가와 음악가가 한떨기 꽃이 되어 세상시비 던져두고 끝없는 물나라로’, ‘장안을 들썩이게 한 악단의 여왕과 백만장자의 정사극’ 등의 제목을 단 기사들이 실렸다. 언론은 그들의 특집기사를 앞 다투어 대서특필했다. 사건이 자살로 마무된 후에도 언론에서는 그들의 죽음에 대한 글과 기사가 꽤 오래 올라왔다고 한다. 그러던 중 그들을 이태리에서 봤다는 제보가 추측과 억측의 시발점이 됐다. 그리고 그런 글이 신문과 잡지에 올랐다. 그 중에는 윤심덕이 ‘사의 찬미’를 녹음한 닛토레코드사에서 음반 히트를 위해 조작한 사건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표를 가장 많이 얻은 주장은 제3국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이태리에서 윤심덕과 김우진을 봤다는 조선 사업가의 제보 이후 김우진의 유가족은 1930년 조선총독부에 수색원을 제출하지만 1931년 11월 이태리에 윤심덕과 김우진이란 이름으로 살고 있는 조선인은 없다는 공식적인 통보를 받는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두 사람이 다른 이름으로 살고 있을 거라 주장하지만 이후로 확인된 바는 없다.

윤심덕이 김우진에게 보낸 마지막 전보에 오사카로 오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고 한다. 당시 김우진은 도쿄에서 독일 유학을 꿈꾸며 독일어 공부를 하고 있었다. 편지를 받고 오사카로 달려간 김우진은 윤심덕을 만나 며칠을 함께 보냈다고 한다. 김우진은 한국 연극계의 선각자였고, 윤심덕은 개화기를 주도했던 여성 예술가였다. 만약 이 일이 꾸며졌거나 누군가 계획해 설득의 시간이 필요했다면, 그 며칠에 핵심적인 뼈대가 설계 됐을 것이다. 센티멘털리즘과 니힐리즘의 결정체라 할 동반자살을 감행한 두 남녀는 당시 최고의 지식인으로 문학과 성악, 연극에서 존재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1920년대는 사회 분위기는 불륜이라고 자살해야 할만큼 어려운 시대가 아니었다. 남녀가 춤을 추는 사교클럽이 있었고, 여성지가 나오던 시대다. 그 시대에 이 두 사람 정도의 지적 수준을 가진 연인이 동반자살을 한다는 건 현실적인 관점에서 많은 의문을 남긴다.


영화 같은 순간들

단국대 대학원장인 유민영 선생의 책 <한국연극운동사>에 의하면, 1920년 초까지만 해도 이 땅에 외국의 유명출판사(영국 맥밀라사)에서 원서가 직접 배달되는 곳은 목포의 김우진 집 하나뿐이었다고 한다. 김우진이 월간 종합지<개벽>에 기고한 어느 글에 한국인 최초로 스타니슬라브스키를 언급하는 내용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스타니슬라브스키는 연기론을 체계적으로 설립한 연극계의 아버지 같은 존재다. 그가 쓴 책은 연극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두말할 것 없이 읽어봐야 하는 교과서 같은 책이다. 어쩌면 김우진의 죽음이 한국 연극계의 발전이란 면에서 두 번 개탄해도 부족한 인물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한편 김우진은 아버지 김성규의 회사 상성합명 회사의 사장직을 맡고 있었다. 이곳은 부동산투자부터, 생산, 판매, 서비스업까지 담당하는 일종의 종합상사였다. 양승국 선생의 책 <김우진 그의 삶과 문학>에 의하면, 김우진의 아버지 김성규는 신구학문에 두루 능하였고, 관계에 진출하여 강원도순찰사까지 역임했던 인물이었다고 한다. 김우진은 그런 자신의 아버지를 ‘정력 있는 천재’라고 불렀다고 한다.

윤심덕은 평양에서 태어나 진남포 사립여학교를 졸업했고 이후 평양 사립 숭의 여학교,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를 다니다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로 전학해 사범과를 우등으로 졸업한다. 그녀는 학교를 다니는 동안 찬송가와 창가 독창자, 요리, 편물과 자수 등 여러 분야에서 다재다능했다고 전해진다. 그 중 음악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던 그녀는 1919년 조선 총독부가 ‘일선융화’ 정책에 따라 실시하던 관비 유학생 시험에 여성 최초로 합격해 도쿄음악학교 사범과에서 성악을 전공한다. 일제강점기였다는 점과 여성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지금의 석사나 박사 과정 수준의 교육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윤심덕과 김우진의 첫 만남은 연극을 통해서였다. 극작가로 활동한 김우진이 연극 동호회 활동을 한 것은 어색할 게 없지만 성악을 전공하던 윤심덕은 위치는 의아한 점이 있었다. 그래서 군산대학교 역사과에 문의한 바로는 동경에서 유학중인 고학생과 노동자들의 모임인 ‘동우회’가 ‘극예술협회’에게 회관 건립기금 마련을 위한 순회연극단을 조직하는데, 공연을 다채롭게 하기 위해 윤심덕이 홍난파의 바이올린 연주와 함께 독창으로 찬조출연을 했다고 전해진다. 이 사실을 두고 윤심덕이 동우회 소속인지 극예술협회 소속인지에 대해 말이 많지만 이후 토월회까지도 그 주축이 극예술협회였다는 점을 보아 극을 주제로 모인 유학생들의 모임이었다는 건 확실하다. 극예술협회가 1920년, 동우회가 1921년, 토월회가 1922년에 만들어 졌다는 사실을 봤을 때 토월회는 동우회와 극예술협회의 아들쯤 된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 해볼 수 있다. 윤심덕이 동우회와 극예술협회 둘 중 어느 곳에 적을 두고 있었는지 정확히 기록하고 있는 자료는 없지만 두 단체가 같이 활동했던 것으로 보아 경계나 구분이 딱히 없던 것으로 보인다. 분명한 사실은 그녀가 활동을 했다는 것인데, 여기서 재미있는 건 그 활동의 내용이다. 윤심덕은 여자 배우가 필요한 공연에서도 배우로서 출연하지 않았고, 남자 배우가 여장을 하고 출연했다고 한다. 당시 여배우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토월회 대표가 여배우를 구하지 못해 창녀에게 출연을 요구했다. 하지만 여배우의 인식은 창녀에게 조차 욕을 먹을 정도로 좋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는 동우회와 극예술협회가 주관하는 공연에서 노래는 했지만 배우로 출연하지는 않았다. 여배우에 대한 사회적 인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극단 대표에게 편지를 쓸 정도로 열정이 있었다고만 정리할 수 있다. 두 단체의 협업 과정에서 피어난 사랑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윤심덕은 인기 많은 여성이었다. 요즘 남자들이 소개팅에 나갈 때 여자의 직업이 아나운서라고 하면 환상에 휩싸이는 것처럼, 당시 윤심덕의 위치도 그러했다. 스캔들도 많았다고 한다. 그녀는 일본 유학 중 홍난파와 채동선을 비롯한 몇몇의 남자들과 소문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김우진이 그 남자들 중 한 명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처음부터 불꽃이 튀었는지 친구에서 연인으로 발전했는지는 둘만 알 수 있는 일일 것이다. 당시 신문과 잡지에 실린 윤심덕에 관한 글을 보면 ‘스타일은 그야말로 동양여자로서는 구할 수 없는 맵시 좋은 스타일의 소유자이다’, ‘누구를 만나도 존경어를 쓰는 일이 별로 드물다’(잡지 신여성 1923년 10월호), ‘언제인가 그야말로 육척이나 되어 보이는 몸에 옥색치마를 발 뒤축까지 끌고 평안도 수건을 맵시 있게 눌러쓰고 평양 천지를 횡행하다 종로 네거리에서 어떤 청년 남자를 만나서 평안도 사투리로 “야 오랍아 너 잘 있댔니”하고 손을 절레절레 흔드는 것을 보았다’(조선일보 1926년 12월 26일)는 내용들이었다. 요즘 여자 같은 혹은 그보다 더 당당한 태도와 말들이 인상 깊다. 여배우 생활에서 오는 이미지와 동생 윤성기의 유학비 마련을 위해 이용문에게 600만원을 신세지면서 그녀에 대한 악성 루머들은 끝없이 생산되고 잊힐만하면 떠올랐다. 조선일보 1999년 11월 5일자에 실린 이규태의 역사에세이나, 세계일보 1998년 6월 30일에 실린 장석주의 글 <사의 찬미 윤심덕>같은 글이 그렇다. 루머들의 진위여부도 중요하지만 중요한 건 김우진이 루머로 괴로워 은둔 생활까지 하고 온 윤심덕을 감싸줬거나 이해해줬다는 점이다. 사건의 특성상 여운이 오래 남는데 그럼에도 그녀와의 만남을 계속 했다는 건 사랑이 아니면 설명하기 힘들다.

이후 윤심덕이 1925년 6월 귀국했을 때 토월회에 들어갔는데, 그녀의 결정에 도움을 준 사람이 김우진이었다. 당시 분위기를 짐작하건데 연극으로 복귀하는 결정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말루 역전 홈런을 날릴 기회가 될 수도 있지만 작품과 극단 선정이 관건이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김우진이 그녀의 미래를 구체적으로 계획해줬을 것이다. 실제로 윤심덕이 들어간 토월회도 김우진의 추천으로 들어갔다. 남도에서 손꼽히는 천재 만석꾼의 아들과 ‘최초’를 달고 살았던 여자의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실제로 영화와 뮤지컬로도 만들어졌다. 있는 그대로 매력적인 인물들이기에 그려진 모습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나열한 몇몇의 정보만 놓고 그려진 이미지가 있다면그 인물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영화나 뮤지컬에서 깊은 윤심덕과 김우진에 대한 진지한 접근은 찾기 힘들었다. 디테일한 연출과 개연성은충분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가 전부다.


사망 혹은 실종

두 사람은 정말 그날 둘의 현실을 비관해 바다로 몸을 던졌을까? 모든 사랑이 그렇듯 윤심덕과 김우진의 사랑도 순탄하지 않았다는 건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그로 인해 동반자살을 한다는 건 극히 낮은 확률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들의 죽음이 ‘사의 찬미’를 히트시키고 대중음악 음반시장이 만들어 질 수 있는 거름이 된 것은 사실이고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김우진은 이용문과의 루머로 만주에서 은둔 생활을 하던 윤심덕을 받아준 남자다. 그리고 그가 추천해준 토월회는 상업적으로 비판을 받고 있었음에도 그녀의 연기생활에 도움이 될 거란 생각으로 추천한 곳이다. 이성적인 결론들이다. 그리고 김우진의 아버지를 봤을 때 집안 환경이 그에게 어떻게 작용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우리가 흔히 똑똑하다거나 천재라는 표현은 부인과 자식이 있는 상황에서 애인과 동반자살을 하는 사람에게 쓰지는 않는다. 그가 극작가로 이야기를 만드는 예술계통에 종사했다는 이유로 사색과 망상이 지나쳐 생긴 일이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보통 작가들은 작품을 쓸 때 감성적인 솜씨보단 수학을 하는 것에 가깝다. 이야기의 흐름과 볼륨을 조절해 사람들의 감정을 조율하는 건 감성적인 대사나 지문보다 구조를 구성하는 수학적 계산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글을 쓰거나 이야기를 만든다기보다 차라리 수학을 한다고 표현하는 게 더 적절하다. 그런 사람이 동갑인 윤심덕과 동반자살을 한다? 단순히 우발적인 일이라고 하기에는 그들이 배를 타기 전 함께 보낸 며칠과 배에 남기고간 편지 그리고 이태리 조선 사업가의 제보. 윤심덕과 김우진의 조각들을 맞추어 나갈수록 의문만 쌓인다. 지금까지 살펴본 이야기가 어쩌면 김우진이 마지막으로 남긴 한 편의 극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취재를 마무리하면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둘 사이의 치정 관계만 부각 되어 두 사람이 쌓아올린 각 분야의 역사적인 공헌들이 매몰 되지는 않을까 하고 말이다. 그들은 현해탄에서 죽었거나 실종됐다. 하지만 그날 우리가 잃은 것은 젊은 두 예술가만이 아닐 수 있다. 우리가 지키고 학습해야할 선구자들의 뒷모습마저 실종 된 것일지도 모른다

광막한 황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苦海)에
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
(후렴)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설움
<김우진 작사, ‘사의찬미’ 1절 가사>


“아름다운 밤이에요”

이 말은 1991년에 만들어진 영화<사의 찬미>의 여주인공인 ‘장미희’가 대종상 시상식에서 여우 주연상을 받은 수상소감이다. 영화 <사의 찬미>는 죽음과 맞바꾼 극작가 김우진의 마지막 역작이 아닌가 한다. 1920년대 비련의 여가수 윤심덕의 일생을 원숙하고 차분하게 담아낸 이 영화는 자유분방한 사고를 가진 윤심덕과 감성 가득한 성격의 김우진, 그리고 이 둘의 사랑을 지켜봐야만 했던 홍난파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현실 이야기를 스크린으로 표현해야 했기에 포장한 부분도 있고 미처 담아내지 못한 사랑의 이야기도 있을 것이라고 사료된다.

둘의 죽음 이후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노래 <사의 찬미>,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난 뒤 영화로 제작된 <사의 찬미>. 현재에 까지 회자되는 둘의 사랑이야기는 극작가 김우진이 그가 가진 모든 것과 맞바꿔 만들어낸 시대를 관통하는 원작이다. 예고하듯이 지어진 <사의 찬미>작사와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으로서 영원한 사랑을 확인했던 주인공들이 나오는 드라마와 영화들. 인터넷상에 떠도는 둘의 이야기는 아직도 흥미롭다. 시대를 뛰어넘어 흥행되는 원작을 만들어낸 김우진은 아름다운 영면의 밤을 보내고 있을까? 아니면 먼 이국의 정취를 느끼며 자신이 만들어낸 작품에 대한 반응을 보고 즐거워하고 있을까?

(어쩌면 지속적으로 회자되는 두사람의 이야기로 인해 아직도 어딘가에서 살아 있을 수도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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