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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산과 박기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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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바람이 입김을 불면 한나무에서 함께 돋아나는 잎이라고 할지라도 여름 광풍과 가을의 서늘한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제각기 떨어진다. 사람의 삶도 이와 매한가지이다. 이러한 자연의이치대로 사람도 홀로 죽어야 하고 다음해에 나온 잎들이 이전해의 그 잎들이 아니기에 다음 생을 기약할 수 없다.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이다.
벌교 부용산 오리길을 걷다보면 중턱쯤에 시비가 세워져 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박기동 시인(1917~2004)이 꽃다운 나이에 세상과 이별한 누이의 죽음을 애닲아 하며 지은 시가 새겨져 있다. 여수 돌산에서 태어나 열 살에 벌교로 이사를 온 박기동 시인은 벌교보통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천재 소년으로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이후 현재 경기고의 전신인 제1고보에 입학하려 하였으나, 당시 배친파인 아버지의 반대로 입학이 무산되었다. 이후 박기동 시인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영문학을 전공 하였으나, 유학중에 모국어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고 한국에서는 국어 교사로 재직하였다.
부용산 시의 내용은 여동생 박영애가 폐결핵으로 24살의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등지자 시신을 부용산에 묻고 내려오는 길에 누이를 잃은 안타까운 심정을 담았다.

부용산 오리 길에/잔디만 푸르러 푸르러/솔밭 사이사이로/회오리 바람 타고/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너는 가고 말았구나/피어나지 못한 채/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부용산 봉우리에/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이 시가 본격적으로 노래로 만들어지고 많은 사람들의 입에 구전되었던 배경은 박기동 시인이 목포항도여중(현 목포여고)에 국어교사로 근무하면서 같이 근무하던 작곡가 안성현과의 만남으로부터 시에 곡을 더해 노래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박기동 선생은 순천 사법학교에 근무할 때, 교육자들의 권익을 옹호하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남조선교육자협의회(일명 교협)에 가입하고 얼마지나지 않아 “교협” 사건으로 4개월 동안 구금되고, 6개월 정직 처분을 받고있을 당시 항도여중의 교장으로 있던 조희관 선생으로부터 학교에 근무해 줄 것을 요청받는다. 의욕 넘치는 교육자이던 조희관 선생은 각계의 유능한 인재를 끌어 모아 학교를 명문으로 만들기 위해 열정을 다했다. 그 중 한명이 음악선생 안성현이다. 안성현은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와 박기동 시인의 “진달래” 등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곡을 쓴 인물이다. 목포항도여중에 재직 당시 김정희라는 뛰어난 제자가 죽자, 박기동 시인의 부용산에 작곡을 더해 노래로 완성했다고 한다. 완성된 곡을 당시 상급반 학생이던 배금순이 불렀고 이 노래는 전남 일대로 퍼져 갔다고 한다.
전혀 사상성이 없는 노래임에도 불구하고 이후 빨치산들이 하루면 말도 없이 죽어가는 자신들의 동료들의 처지를 생각하면서 노래를 즐겨 부르게 되었다고한다. 그리고 이 노래를 작곡했던 안성현 선생의 월북은 박기동 선생이 사상적 핍박을 받게 된 결정적인 계기들이었다. 이후 운동권과 사회운동을 하는 단체에서 즐겨 부르던 이 노래로 인하여 전두환 정권 시절까지 수많은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한동안 박기동 시인은 호주에 살고 있었는데, 항간에는 박기동 시인이 독재정권 하에서 잡혀 갔다. 혹은 생을 마감했다더라는 소문들이 무성했던 시절이 있었다.
박기동 시인의 노래는 구전으로만 전해 오다가 민중가수 안치환이 1997년‘노지텔지어’ 앨범에 녹음하면서 부터이다. 이때만 해도 작자 미상으로 표기되었다가 1998년 2월 14일 한국일보 김성우 에세이를 통해서 비로소 박기동 시인의 작품임이 세상에 알려졌다. 이때까지만해도 부용산은 1절만 존재하고 있었으나, 김성우 씨에 의한 부탁으로 박기동 시인은 2절을 완성하게 되었고, 현재에 이르렀다.

부용산 오리 길에/잔디만 푸르러 푸르러/솔밭 사이사이로/회오
리바람 타고/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너는 가고 말았구나/피어나
지 못한 채/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부용산 봉우리에/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53년의 세월을 통해서 1절과 2절의 노래가 완성이 된 것이다. 2절의 작시를 하던 시인은 회한의 세월 앞에 30여 분이나 엎드려 울었다고 한다. ‘부용산’이 세상의 밝은 빛을 보게 된 계기는 연극인 김성옥 씨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노래에 대한 탄생배경과 악보를 구하고 호주에 건너가 박기동 시인을 만난 김성옥 씨는 2007년 5월 29일에는 ‘목포부용산음제’를 열기도 했다.

박기동 시인은 특히 교가 등을 많이 작사하였다. 벌교초등학교, 벌교중학교, 벌교상고 등은 현재까지도 박기동 시인이 작사한 교가를 부르고 있고, 항도여중 재직시절 만든 문예지 ‘새싹’은 우리나라 최초로 학교에서 발간된 문예지이기도 하다.

박기동 시인의 부용산 시비는 1999년 3월 30일에 부용산 중턱에 세워지고 이후 2002년에는 목포여고(전 항도여중)의 교정에도 시비가 세워졌다. 박기동 시인은 삶을 마감하기 바로 전해인 2003년에 벌교에 방문하고 시비를 둘러보았다. 이 자리에는 안성현 선생의 부인인 송동을 여사를 만나 안성형 선생의 소식을 묻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박기동 시인은 2004년 서울의 한 병원에서 고단했던 삶을 마감하고 만다.

박기동 시인은 평생에 걸쳐 시집을 내는 것을 소원하였는데, 시를 쓰게 되면 언제나 보국에서 찾아와 써놓은 시들을 빼앗아 가버렸기 때문에 시집을 정식으로 출간하지 못했다고 한다.
평생 시인으로 남고 싶어 했던 박기동 시인의 작 부용산은 세대와 시간을 거슬러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읊어지는 노래로 많은 시간을 살아 숨 쉴 것이다.

부용산자락에는 시인의 누이를 닮은 순백의 흰꽃이 피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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