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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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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에 흩뿌려진 1004개 섬 중의 하나.

파도에 닻을 내린 섬은, 유난히 푸른 산과 바위가 많다.

그 수려한 산세와 기괴한 암석 때문인지 유독 인물이 많은 섬 비금도,

바지런한 섬이 길러낸 더 많은 이야기가 이 섬에 있다.

세상을 지배하는 돌, 이세돌

비금도에 도착하기 전 멀리부터 보이는 것은 ‘천재바둑 기사 이세돌의 고향, 비금도’ 라는 표지판이다. 바둑 한 판 이기고 지는 것이 무엇이라고, 그래봤자 세상에 아무 영향도 없는 것이라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의아한 섬 소개가 될 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땅따먹기라고도 하고, 다른 누군가는 전쟁이며 인생의 흥망성쇠를 모두 담는다고도 칭송하는 바둑. 하지만 비금도의 이세돌 박물관을 방문하면 바둑이 단순히 흑과 백으로 이루어진 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작은 섬, 비금도에 천재바둑 기사 이세돌이 태어나면서 일어나는 변화들을 보아도 그렇다.

이세돌은 비금도 도고리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도시에서 교편을 잡았던 이세돌의 아버지 이수오 씨(아마 五단)는 고향 비금도로 내려와 교사 생활을 하며 농사를 지었다. 그는 5형제 모두에게 바둑을 가르쳤는데, 이세돌은 재능이 남달라 5세에 바둑에 입문해 이미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를 뛰어넘는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아버지가 아침 일찍 과수원에 나가기 전에 어린 이세돌에게 사활문제(대마의 생사가 걸린 맥을 찾는 문제)를 내어주고 돌아와 점검을 하는 방식의 바둑수업은 그가 서울에 가기 전까지 계속 되었다. 누나 이세나 씨(아마 九단)은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매일 사활문제와 씨름하고 있던 세돌이의 안쓰러운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당시를 회고한다. 비금도에서 일찍이 시작한 아버지의 바둑 교육은 이세돌이 서울의 도장으로 유학을 가면서는 형의 헌신으로 이어졌다. 이세돌의 형 이상훈 九단은 그의 든든한 조력자로 초기 입단 생활을 도왔다. 이세돌은 막내답게 고집이 셌지만, 하고자 하는 일에는 기필코 이루려는 집중력과 승부욕을 갖추고 1995년 프로에 입단한 후 5년 여 만에 정상의 자리에 올랐다. 압도적인 수읽기를 통한 흔들기로 상대를 난전으로 끌어들여 혼란시키는 이세돌의 저돌적인 플레이는 당시 정상에 있던 이창호 九단의 치밀하고 숨 조이는 신중한 플레이와 비교되곤 하였다. 이세돌의 바둑은 바둑의 본질인 싸움에 초점을 맞추고, 그의 자서전 제목처럼 ‘판을 엎는’ 거칠 것이 없는 플레이를 펼쳐 단숨에 천재바둑기사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최근 구리 九단과의 10번기(10번을 겨루어 승부를 내는 경기방식)로 한중 양국간의 바둑 자존심을 내건 경기에서 6승으로 최종승리를 거둔 이세돌은 여전히 쎈돌임을 바둑으로 입증하고 있다. 언론은 그에게 비금도에서 온 ‘섬 소년’이라는 별칭을 주었지만, 이세돌은 소년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해서 성장해 나가며 ‘세상을 지배하는 돌’이 되어가고 있다.

걸어도 걸어도, 명사십리해수욕장

바둑기념관 뒤편으로 명사십리까지 근 500m 구간은 시누대가 감싸 안은 아치형태의 망각의 길이 펼쳐진다. 바람에 부딪히는 시누대 소리를 들으며 이 길에 들어서면 미처 두고 오지 못한 시름과 걱정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10여 분을 걸으면 갑작스레 확 트인 해변이 눈앞에 펼쳐진다. 명사십리 해수욕장이다. 비금도는 숙박시설과 편의시설들 없이 원시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해변이 많다. 때문에 축제와 폭죽, 사람으로 북적이는 해수욕장 보다는 한적하고 사색을 즐길 수 있는 휴양지의 느낌을 준다. 비금도에는 해당화로 유명한 원평해수욕장과 하누와 너미의 사랑이야기를 간직한 하누넘해수욕장 등 아름다운 해변이 곳곳에 있지만,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는 명사십리해변에 들어서면 그 광활함에 압도당한다. 2.8Km의 긴 모래사장은 비금도 북쪽 원평해수욕장의 1.4Km의 해변까지 이어져있다. 해변 한쪽에는 거대한 풍력발전기 3기가 전력을 생산하고 있는데, 해변이 넓어 마치 수수깡으로 만든 바람개비처럼 작아 보일 정도다. 풍력발전기는 저탄소 전력생산으로 비금도의 깨끗한 환경을 유지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명사십리해수욕장에서는 굳이 물에 발을 담구지 않아도 바람이 시원하며, 고운모래가 점토처럼 단단해 신발에 모래 스며드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한여름에 이곳 명사십리해수욕장에 와도 해수욕보다 산책을 하는 이가 더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명사십리해수욕장에 또 다른 매력은 긴 백사장을 드라이브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경비행기가 활주로로 사용하여도 거뜬하다고 하니 모래의 점성이 얼마나 좋은지 알 수 있다. 물이 빠진 해안을 따라 질주하는 차는 어느 광고를 연상케 한다. 다만 근사한 기분에 취해 물이 드는 줄도 모르고 곤란한 상황에 처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하누를 기다리는 너미의 심장, 하누넘해변

하누넘해변으로 향하는 길은 그림 같은 다도해 풍광이 펼쳐져 있다. 바다사자를 닮은 섬이 있는가 하면 서로를 부둥켜안은 바위가 있고, 크고 작은 섬들이 떠밀려오는 듯한 큰 파도가 인상적이다. 굳이 지정된 전망대에 오르지 않더라도 매력적인 풍경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하누넘해변은 바다에 나가 돌아오지 않는 하누를 기다리는 너미의 슬픈 이야기가 담겨 있다. 영락없이 누워있는 여자의 형상을 한 바위와 해변의 선명한 하트 모양에 누구나 놀라게 되는 곳이다. 사랑의 해변이라 불리는 하누넘해변은 KBS드라마 ‘봄의 왈츠’ 촬영지로, 남녀 주인공이 사랑을 확인하는 에피소드의 배경이 되어 화제가 되었다. 멀리 해변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두 연인이 입을 맞추고 있는 하트 모양의 조각상이 세워져 지금은 많은 연인들의 필수 방문지로 각광 받고있다. 조각상 안에 사랑의 우편함이 마련되어 있어 풍경에 취해 사랑하는 이에게마음을 전할 용기를 갖게 한다. 다만, 편지는 1년 뒤에 도착하므로 변하지 않은 사랑을 약속하는 것이 좋다.

금이 날다

비금도(飛禽島), 섬의 형상이 날개를 활짝 편 독수리의 모양으로 ‘독수리가 난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허나 비금도 주민들은 농담처럼 ‘금(金)이 날아다닌다.’ 라고 해석을 덧붙이곤 한다. 염전의 호황으로 개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닐 정도로 부유한 섬으로 통하는 연유이다. 신안에 많은 섬들이 비옥한 갯벌바다에서 빚어낸 천일염으로 유명하지만, 비금도의 천일염은 단순히 품질을 넘어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광복 후 우리 손으로 만든 서남해 첫 천일염전이 이 곳 비금도에 있기 때문이다.

그 옛날에는 ‘화렴’이라 불리는 소금은 복잡한 공정을 거쳐서 탄생했다. 갯벌의 흙과 섞어서 염도를 높인 바닷물을 장시간 끓여야만 겨우 소량의 소금을 얻어낼 수있었다. 갯벌의 탁함을 탁한 바닷물로 더욱 가중시켜 뽀얀 소금으로 걸러내는 그과정이야말로 역설이고 정성이고 신비로움이 아닐 수 없다. 그 결정체가 얼마나 귀하고 소중했으면 하얀 금, 소금(素金)이라 불렀겠는가? 광복직후인 1946년, 일제강점기 먹고 살거리를 찾아 만주에 갔거나, 평안도 염전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고향 비금도로 돌아왔다. 이들을 대표하는 사람이 손봉훈,박삼만 씨이다. 두 사람을 주축으로 간척지만 확보하면 대량생산이 가능한 천일 제염방식이 도입되었다. 곧이어 작은 믿음을 갖고 시작한 이들은 지게로 돌과 흙을 모아 제방을 쌓았다. 그렇게 완성된 것이 서남해 첫 천일염전 ‘시조염전’(1호 염전)이다. 그 해 6월 준공한 천일염전지에서 하얀 금이 나오기 시작했다. 수림리 시조염전에서 가능성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사람들은 이듬해 1947년, 450명의 주민들로 구성된 조합을 만들고 가산과 시랑도, 떡메산을 잇는 방조제 구축을 시작한다. 함께하여 모두가 행복한 염전이라는 ‘대동염전’은 이렇게 탄생하였다.

모두가 어려웠던 시절, 보리개떡과 나물죽을 먹어가며 돌을 이고 날랐던 사람들의 간절한 염원이 100ha가 넘는 광활한 바다를 매꾼 것이다. 비금도의 천일제염의 기술이 신안의 다른 섬들은 물론 서남해 연안으로 확산되었다. 앞서 성공한 염전축조와 운영의 노하우를 다른 섬으로 보급하며 비금도는 가히 천일제염방식의 보급기지가 되었다. 이러한 ‘대동’ 정신으로 신안은 금이 나는 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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