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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머리소년, 문어와 함께 행복하게 살다 

전통의례음식 무형문화재 42-1호 서용기 선생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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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문 대신 ‘문어’를 익힌 호기심 많은 소년 

서당 다니던 18세 소년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아주 희미했다. 소년은 세 살 무렵 아버지를 잃고 코밑이 거뭇해질 때까지 숙부의 그늘에서 자라났다. 어느 날 서당에 다니며 글을 배우던 소년 앞에 숙부가 작은 칼과 문어를 내려놓았다. 다른 형제들보다 손 재주가 좋으니 문어오림(덜 마른 문어다리를 이용해 만드는 의례음식으로, 전통혼례상이나 *현구고례에 쓰임.)을 배워보라는 의미였다. 호기심 많은 소년은 거리낌 없이 칼자루를 쥐었고, 오래전부터 어깨 너머로 보아온 숙부의 모습을 떠올리며 제법 그럴듯한 모양을 만들어냈다. “역시 내 짐작대로 손재주가 좋구나. 나는 눈이 어두워져 문어오림을 하기 힘들다. 네 할아버지 때부터 이어온 가업을 누군가는 계속 이어가야 할 텐데. 내가 보기엔 용기 너 밖에 없을 것 같다.”소년은 그렇게 문어와의 운명적인 만남을 시작했다. 

‘칭찬’, 흰머리소년과 문어를 춤추게 하다 

지난 60년 동안 문어를 행복의 재료로 삼아 다른 이들의 의미 있는 순간을 더욱 의미 있게 만들어온 서용기 선생. 그의 작품은 작지만 섬세하고,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다른 이의 행복을 비는 염원이 묻어난다. 그의 머릿속에는 봉황과 국화, 소나무가 언제나 생생하게 살아 숨쉰다. 18세부터 문어다리를 오려 큰상(혼인날 신랑신부 또는 회갑을 맞은 부모에게 갖가지 음식을 풍성하게 고여 축하하는 상)에 올릴 의례음식을 만들어 온 서용기 선생. 그는 조부와 숙부의 뒤를 이어 삼대 째 문어오림을 해오고 있다. “숙부님한테는 여섯 명의 아들 들이 있었어. 우리 집에도 여섯 명의 아들들이 있었고. 그런데 하필이면 숙부께서 나더러 문어오림을 해보라는 거야.” 얼마 전에 보청기를 잃어버렸다는 서용기 선생은 한편으론 귀를 쫑긋 세우고, 다른 한편으론 젊은이도 그 기세에 눌릴 만큼 우렁찬 목소리로 지난날을 회상 했다. “예전에는 신부가 시집을 가면 시댁에 올릴 큰상을 준비해 갔어. 특히 상객이라고 부르는, 가문에서 배출한 걸출한 인물이 시댁 어 른으로 큰상을 함께 대접받았지. 한번은 집안에 경사가 있어서 내가 직접 상을 차리고 문어오림을 했는데, 당시 국회의원을 지낸 분이 이런 잔칫상은 처음 받아본다며 칭찬을 하셨더랬지. 주변 사람들도 내 작품을 보면서 항상 멋들어지다고 칭찬을 했고.” 문어오림이라는 전통을 고수해온 장인이자, 평범한 시골 농부인 서용기 선생은 두 눈을 빛내며 손때 묻은 사진첩을 넘겼다. 그의 눈빛에서는 어느새 잔잔한 자부심이 흘러나왔다. 사람들의 크고 작은 칭찬이 서용기 선생을 이 곳까지 이끌어온 힘은 아니었을까 짐작해보았다. 

*현구고례: 혼인 후 신부가 폐백을 자기고 시집으로 가서 처음으로 시부모님을 뵙는 일 

젊은이들에게는 아직 낯선, 문어오림에 대해…

봉황, 국화, 소나무 등의 모양으로 문어오림을 하는 이유는? 

“봉황은 예부터 장수를 상징하는 전설 속 영물로, 암수가 언제나 함께 하면서 절개를 지킨다고 해. 소나무 역시 일 년 열두 달 푸르러 변치 않잖아. 학은 또 상서로운 기운을 지닌 새고. 시집간 신부에게 굳은 절개를 지키라는 의미로 봉황, 소나무, 학 모양으로 문어오림을 만들지. 

문어오림을 만드는 방식. 

“덜 말린 문어다리를 사다가 다듬이방망이로 양쪽 끝을 살짝 살짝 때려가면서 길이를 늘려 줘. 두께는 너무 얇지도 두껍지도 않게 일정해야 해. 문어를 두꺼운 상태로 말리면 제대로 된 작품이 안 나와. 그래서 양쪽 끝을 조심조심 잘 두드린 다음 말려야 해. 짧은 문어다리는 쓸 수가 없어. 어떤 사람들은 문어를 가위로 잘라 하나하나 이어 붙여서 봉황을 만들고 학을 만들지만, 내 작품 은 문어다리 하나로만 만들거든. 그래서 문어다리가 짧으면 작품을 완성할 수 없지. 또 중간에 끊어지면 실패한 거고.” 

문어오림을 하는데 있어 어려운 점은? 

“날씨가 흐리면 문어가 수분을 머금어서 작업하기가 힘들어. 문어는 바다에서 나오는 거라 소금기가 많아. 비가 내리면 금방 습기가 차서 쉽게 늘어져 버리지. 또 작품을 완성하고 나서는 보관이 중요하고. 완성된 작품은 공기가 통하지 않게 아크릴 상자에 넣어 보관해야 돼. 안 그럼 곰팡이가 피어서 시커멓게 변해 버리지.” 

허락된 순간까지 즐겁게 ‘전통의 밥 짓기’

심혈을 기울이는 섬세한 손길로 생명력을 간직한 문어오림을 만들어내는 서용기 선생. 그의 작품을 보고 있자면 “오~ 멋지 다!”라는 탄성이 저절로 흘러나온다. “자, 이렇게 나비를 만들어서 국화꽃 위에 살포시 내려앉게 해야 해. 놀라기는? 내 머릿 속에는 잘 익은 밥풀처럼 나비도 국화도 전부 들어있어.” 여전히 18세 소년의 눈빛을 한 서 선생은 빙그레 웃으며 국화꽃 위에 내려앉을 나비를 오렸다. 한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선 꼬박 하루나 이틀이 걸린다는 그. 여든의 나이에 오랜 시간 몸을 구부리고 작업을 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을 텐데도 그는 여전히 거뜬한 일이 라고 당차게 말한다. “문화재가 되었다고 해서 사람이 가만히 있으면 되나. 몸을 자꾸 움직이고 일을 해야지. 눈이 어두워서 못한다면 모를까. 아직도 시력은 젊은 시절과 변함이 없어. 그러니 건강이 허락된 순간까지는 즐겁게 일 해야지.” 돋보기도 쓰지 않고 조그마한 나비를 오려내는 그의 모습이 놀라웠다. 아마도 그것은 그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일에 대한 열정 덕분이리라. 

전통의례장인으로 지정된 후 처음으로 인터뷰에 응했던 잡지. 

“바른 생각을 하면 바른 길이 찾아온다네.” 

서용기 선생은 인터뷰 도중 삶은 옥수수와 포도 몇 송이를 간식으로 내오셨다. “자, 어서들 먹어. 질문을 많이 해서 속이 허할 텐데. 꼭 우리 손자손녀를 보는 것 같고만.” 서용기 선생은 개구쟁이처럼 활짝 웃으시며 둥근 소반을 앞으로 미셨다. 옥수수 킬러인 탓에 사양하기는커녕 “잘 먹겠습니다~!” 를 씩씩하게 외치며 허겁지겁 옥수수를 먹어치웠다. 그러고 나자 문득 남은 질문이 떠올랐다. 그래서 “그동안 만든 작품은 전부 어떻게 하셨어요? 집안에는 몇 점 안 남아 있는 것 같은데.”라고 묻자, 서 선생은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셨다. “여기저기에 기증을 하거나 선물로 줬지. 사람들이 만들어 달라고 하면 문어를 직접 사다가 그냥 만들어 줬고. 이제껏 돈을 받고 팔아본 적은 없어.” 그 말을 듣고 나니 더 큰 궁금증이 밀려왔다. “어째서 그냥 주시는 거예요? 마땅히 대가를 받아야 할 훌륭한 작품들인데….” 그러자 그는 “탐욕을 부리면 안 된다는 게 내 생각이야. 바른 생각을 하면 바른 길이 찾아오고, 그른 생각을 하면 그른 길이 찾아오지. 내 작품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주고 살아온 덕분에 이렇게 무형문화재가 됐잖아. 그걸로 만족해.”라고 답하셨다. 

서용기 선생이 인터뷰를 마치고 즉석에서 만들어낸 봉황. 

‘희망 섞인 내일’로부터 걸려온 전화, 하지만.. 

전통문화에 대한 젊은 세대의 무관심으로 문어오림 전승에 어려움이 많을 것 같다고 묻자 기대하지 못했던 대답이 돌아왔다. “아니야. 30분 전만 해도 서울에서 전화가 걸려왔어. 문어오림을 배울 수 있느냐고. 가끔씩 그렇게 젊은 사람들한테서 전화가 걸려와. 외국인들 중에서도 배우려는 사람들이 많고. 캐나다 사람, 일본 사람들이 찾아와서 배울 수 없는지 묻더군. 그런데 가르칠 공간이 있어야지.” 의외로 문어오림을 배우려는 젊은이들이 적지 않다는 말에 내심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무형문화재라는 타이틀이 갖는 무게감 때문일까. ‘나 역시 배워서 할 수 있다’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던 찰나, 문어오림을 배우려는 젊은이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은 무척 신선하게 다가왔다. 

서용기 선생은 안타까움이 배어나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예전엔 전남대 학교에서 강의를 했었어. 하루 세 시간씩, 일주일에 두 번. 헌데 일주일에 6 시간 강의를 듣고서 어떻게 문어오림을 깊이 있게 배우겠어. 아무래도 전용 교육공간이 있으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문어오림을 가르쳐 줄 수 있겠지. 그런데 지역에서는 이런 일에 도통 관심이 없어. 그렇다고 시골에서 농사짓는 촌부가 혼자서 하기는 어렵고.” 서용기 선생의 한숨은 결코 가벼워 보이지 않았다. 무형문화재를 지정하는 것은 말 그대로 보존할 가치가 있는 전통문화의 맥을 잇기 위함이다. 물론 개인이 무형문화재 전승자로 지정되어 그가 걸어온 길을 명예롭게 보상받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중요하게 인식되어야 할 것은 ‘어떻게 하면 계속해서 전통을 계승해나갈 후대를 키워내는가’하는 점이다. 선배 세대를 뒤따르는 후배 세대가 빛나는 문화유산을 변함없이 지켜나갈 수 있도록 실질적인 토대를 마련해주어야 한다. 현재 무형문화재 전승자들은 한달 지원금으로 80여만원을 지급받고 있다. 하지만 교육공간과 교육생들에게 지급해야 할 생활비 등을 어림잡아 보아도 무형문화재 전수에 어려움이 따를 거라는 예상은 어렵지 않다. 

흰머리소년에게 남은 단 하나의 꿈 

“이 길을 걸어오면서 그리 많은 방황은 하지 않았어. 그저 농사를 지어 처자식을 먹여 살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고, 틈틈이 문어 오림을 하면서 살아올 수 있어 감사했지. 게다가 문어오림으로 결국 가업을 잇고 집안을 빛냈으니 그걸로 충분하고. 하지만 딱 하나 소원이 있다면, 건강이 허락되는 한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문어오림을 전수해주고 싶단 거야. 젊은 사람들을 가르치던 무렵에는 내가 봉황이며 학을 만들어내면, 젊은이들이 내 작품을 보고 탄성을 지르면서 감탄하곤 했지. 항상 내 주변을 기웃거리면서 ‘선생님, 저도 가르쳐 주세요!’라고 아우성들이었어. 그런 모습을 볼 때면 정말 기분이 좋았어. 이제껏 살아오면서 기뻤던 순간들도 많았지만 그 순간만큼 기뻤던 때는 없었던 것 같아. 물론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무형문화재 전승자로 지정 됐을 때 ‘이제야 우리 가문에 빛이 드는 구나’라고 기뻐했지만 젊은이들을 가르칠 때만큼은 아니었던 것 같아. 내가 해온 이 일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어. 문어오림이라는 전통이 사라지지 않도록.” 전통의례음식무형문화재에 지정됐던 순간보다 젊은이들에게 문어오림이라는 전통을 전하던 순간에 더 큰 보람과 희열을 느꼈다는 서용기 선생. 그는 무형문화재라는 상아탑에 갇혀 고루해지기를 원치 않는다. 오히려 젊은이들과 함께 ‘청춘’이라는 이름으로 한데 어울려 ‘우리 것’을 지켜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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