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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의 심장이 부르는 노래 신안 안좌도

남도의 섬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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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과 물 사이에 놓여 쉽사리 누군가를 허락하지 않는 완고함. 지나치게 느린 속도. 도시문화와 동떨어진 세련되지 않은 생활상. 사람들은 대부분 ‘섬’ 하면 이런 이미지를 먼저 떠올린다물론 앞서 열거한 단어들은 여전히 섬이 간직하고 있는 표정의 일부이기도 하다. 하지만 섬에는 지나온 세월과 느리지만 변해가는 오늘의 흔적이 조화롭게 살아 숨쉰다. 


섬들의 정원에 숨은 천사의 심장 신안군과 안좌도 

전남 신안군은 크고 작은 섬들이 아름답게 피어난 ‘섬들의 정원’이다. 실제로는 유인도와 무인도를 합쳐 1025개의 섬들이 존재하지만, 그중 21개는 생명이 살지 않는 섬으로 현재 공식적으로는 1004개의 섬들만이 신안군을 대표한다. 덕분에 ‘천사의 섬’이라는 흥미로운 수식어로 불린다. 그 가운데 안좌도는 신안 섬들의 중심, 이를 테면 심장에 비유된다. 신안군 14개 읍면의 중앙에 놓여 동쪽으로는 해남 화원반도를, 서쪽으로는 비금도와 도초도를, 남쪽으로는 장산도, 그리고 북쪽으로는 팔금도를 거느리고 있다. 

이른 아침 목포에서 차를 달려 신안 암태도행 배가 오가는 송공항에 도착했다. 2월 끝자락, 항구의 바람은 정든 겨울을 떠나보내기 싫은지 사납게 얼굴을 할퀸다. 오전 10시. 차도선이 1층 갑판 위에 차량을, 2층 선실에는 뜨끈한 아랫목에 둘러앉은 사람 들을 싣고 목포에서 암태도 오도항을 향해 항해를 시작한다. 카메라를 들고 층계로 나서자 허옇게 뒤집힌 파도가 재빨리 손을 뻗어 물세례를 보낸다. 성난 파도 탓에 어쩔 수 없이 선실로 되돌아온다. 따뜻한 공기에 나른해진 승객들이 벽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다. 시계를 보니 시각은 10시 30분. 선내에 두어 번 의 사이렌 소리가 울리고, 어느새 암태도 오도항에 도착했다는 방송이 이어진다. 


흙에 대한 열망, 그 섬을 낳다 안좌도의 탄생 

여행지인 신안 안좌도로 가기 위해 암태도 오도항에 내린 후 승합차에 올라탔다. 차는 암태도의 아래 섬 팔금도를 연도교로 지나 또다시 남쪽으로 팔금도와 안좌도를 잇는 신안1교를 통과했다. 섬과 섬을 잇는 연도교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바람이 차창에 부딪히며 소리를 낸다. 도로 옆으론 봄을 맞이하기 위해 갯벌을 갈아엎는 새우양식장이 보였다. 신안1교를 지나 바야흐로 안좌도에 접어들자 전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논과 밭, 산이 어우러진 익숙한 풍경이 펼쳐진다. 머릿속에 떠올린 바다 한가운데 고즈넉한 섬의 이미지와는 다르다. 알고 보니 안좌도는 300년 동안 꾸준히 간척사업이 진행되어온 곳이란다. 과거에는 북쪽과 남쪽에 위치한 두 개의 큰 섬 ‘기좌도’와 ‘안창도’를 중심으로 작은 섬들이 점점이 흩어진 형태였다. 하지만 더 넓은 땅을 갖고자하는 열망은 섬과 섬 사이에 놓인 푸른 여백을 자갈과 모래로 채웠다. 독립적으로 존재하던 10여 개의 섬들은 하나로 합쳐져 ‘안좌도(안창도의 ‘안’과 기좌도의 ‘좌’가 결합된 명칭)’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이후 들쑥날쑥하던 해안선은 49.7km에 이르는 완만한 곡선으로 탈바꿈했고, 섬의 면적은 46.29㎢에 달하게 되었다. 


점과 선, 한국적인 시(詩)를 간직한 긴 울림 화가 김환기 생가 

낮은 능선으로 이어진 구불구불한 섬길을 달려 읍동에 위치한 안좌주민센터에 도착했다. 그곳에 잠시 들러 면장님을 찾아뵙고 안좌도에서 둘러볼 만한 명소를 물었다. 그 물음에 가장 먼저 돌아온 대답은 읍동리 마을 안쪽에 남아있는 화가 김환기의 생가. 공교롭게도 올해는 ‘김환기 탄생 100주년’을 맞는 해다. 의미 심장한 시기에 우연히 첫 방문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수화 김환기(1913~1974) 선생은 한국 추상미술의 제1세대로 불리며 자연과 여인, 전통적인 풍경이 불러일으키는 서정성을 한국적인 모더니즘으로 풀어낸 작가로 손꼽힌다. 선생의 생가로 오르는 담벼락에는 인상적인 핸드프린팅이 남아 있었다. 지난 2009년 김환기국제미술제전에 참여한 독일 작가 8명이 남겨놓은 흔적이다. 국경을 초월해 그를 동경하는 후배들의 감수성을 엿볼 수 있었다. 한편, 화가의 생가는 1910년 그의 부친이 백두산에서 나무를 옮겨와 지은 북방식 가옥으로 세월의 은은한 윤기를 머금고 있다. 아직은 차가운 툇마루에는 화가의 초상과 아내와 함께 찍은 흑백사진이 두 장의 엽서처럼 방문객을 환히 맞는다. 현재 생가를 이루는 가옥은 안채와 화실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화실은 수화 김환기 선생이 안좌초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간 후 방학 때면 고향에 내려와 작업을 하던 곳이다. 섬에 대한 어린시절의 기억 때문일까. 화가의 작품 속에는 늘 한반도의 남쪽 섬, 섬들의 어머니인 ‘신안’이 품고 있는 아름다움이 차갑지 않은 세련됨으로 그윽하게 고여 있다. 

안좌도 곳곳에는 김환기 선생의 작품이 벽화로 남아 있다.
김환기 선생의 생가로 오르는 담벼락에 남겨진 독일작가 8인의 핸드 프린팅 
생가의 툇마루에 걸려 있는 화가와 그의 아내 김향안 씨의 사진 

죽음 앞에서 행복한 삶을 기원하다 방월리 고인돌 

신안에서 네 번째로 큰 섬이라선지 안좌도는 쉽사리 바다를 보여주지 않았다. 암태도의 오도항을 출발해 연도교를 지난 이후론 계속해서 논밭이 펼쳐졌다. 중간 중간에 덩그러니 놓인 야트막한 산들은 과거에 섬이 아니었을까 호기심을 자극했다. 화가 김환기의 생가를 나서 두번째로 향한 곳은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이 남아있는 방월리. 이미 오래전부터 이곳 주변에서는 고인돌이 발견됐다. 학명으로는 지석묘로 불리는 고인돌 유적은 섬에서는 드물게 발견되는 장묘문화의 흔적이다. 하지만 안좌도에서는 이미 5개의 지석묘군 40여기, 3개의 고분군 6기 등이 이례적으로 발견됐다. 이는 곧 청동기 시대부터 이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는 기록인 셈이다. 마을입구에서 몇 걸음 걷지 않아 섬 사람들이 풍년과 풍어를 기원하며 당제를 올렸던 지석묘를 만났다. 원래는 7기가 남아있어 ‘칠성바위’라고 불렀다는데 현재는 2기만이 남아 있다. 2기의 지석묘 중 하나는 지난 1984년 전남도 문화재자료 제 117호로 지정되었다. 둔중한 무게감을 내색하지 않은 채 굳은 침묵으로 일관하는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상서로운 기운을 풍긴다. 2기의 방월리 지석묘 곁에는 여전히 맑은 물이 샘솟는 작은 우물이 놓여 있다. 마을사람들이 식수원과 빨래터로 삼던 우물가에 앉아 가만히 지석묘를 올려보았다. 코흘리개 아이들이 술래잡기를 하고, 아낙네들이 온갖 근심과 소원을 고백하며, 반백의 노인들이 정성을 다해 당제를 올리는 모습. 다채로운 옛 일상이 얼어붙은 대기를 비집고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방월리 들녘, 영원한 잠속에 빠진 옛 안좌도 사람들의 흔적 
칠성바위 옆 우물. 맑은 물이 여전히 샘솟는다. 

거꾸로 뒤집힌 배와 반달을 맺어준 큐피드 박지도와 반월도를 잇는 ‘천사의 다리’ 

화가 김환기 선생의 어린 시절을 지나 섬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드넓게 펼쳐진 논밭을 가로질러 도착한 곳은 안좌도에선 처음으로 보는 바다. 안좌면의 끝자락인 두리 해변에는 지 난 2010년 섬 박지도와 반월도를 ‘┌’모양으로 잇는 해상 목교인 ‘천사의 다리’가 세워졌다. 거꾸로 뒤집힌 배 형상을 한 ‘박지도’와 반달모양의 ‘반월도’를 잇는 나무데크는 굵직한 축대를 촘촘히 세워 튼튼하고 균형감 있는 위용을 자랑했다. 2-3m높이의 목교 아래로는 두툼하고 비옥한 갯벌이 가지런히 호흡했다. 원래 이맘때쯤이면 싱싱한 감태가 초록빛으로 갯벌을 뒤덮는다는 데 봄기운이 약한 탓인지 구경하기가 쉽지 않다. 총길이 1,462m 에 이르는 천사의 다리는 걸어서 왕복하는데 빠르면 1시간 반, 여유롭게 걸으면 2시간 남짓이 걸린다. 목교 중간에 멈춰서서 섬과 섬을 섬세하게 잇는 매력적인 큐피드를 바라보았다. 섬다운 섬의 의미를 퇴색시킨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이래저래 불편함을 감수하며 배편을 교통수단으로 삼아온 주민들에게는 천사의 다리가 정말 천사일 터. 평범한 걷기에 지루해졌다면 천사의 다리를 찾아 바다 위를 걷는 즐거움을 마음껏 만끽하길.


검은 갯벌 위를 농구공과 뒹군 섬 소년들 영화 ‘섬개구리 만세’와 사치분교 

첫째 날 일정을 마치고 한운리 민박집으로 향했다. 이날 찾은 민박집은 안좌도에서 유일하게 문화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는 김유자 씨의 집. 구름도 한가로이 머문다는 한운리. 그녀의 집 마당에선 바다 건너 사치도가 보인다. 소박하면서도 맛깔스런 저녁 밥을 대접받으며 유자씨의 남편, 김재광씨로부터 사치도와 얽힌 재미난 추억담을 들을 수 있었다. 그건 바로 1970년대 전국을 들었다놨던 ‘사치도 섬개구리’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70년대 초 사치분교로 부임한 부부교사는 소년들을 모아 농구부를 결성한다. 제대로 된 농구시설조차 없었던 소년들은 날마다 갯벌과 모래밭을 뒹굴며 농구를 배웠다. 허나 그들은 단지 농구를 배우는 데 그치지 않는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서 제1회 전국소년체전에 전남대표로 참가한다. 그리고 드라마틱하게도 전국체전에서 준우승을 거머쥔다. 

재광씨는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 일 덕분에 ‘섬개구리 만세’라는 영화까지 만들어졌죠. 그땐 정말 섬 전체가 떠들썩했어요. 하지만 그게 끝이었죠.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농구를 지속한 선배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계속해서 재능을 이어갈 기회를 얻지 못한 거죠.” 그의 얼굴에는 씁쓸함과 안타까움이 배어났다. 사치분교는 결국 섬개구리들의 추억을 간직한 채 지난 2000년 학교로서의 운명을 마감했다. 하지만 다행스러운 건 아직까지 흑백 영화와 그날의 환희를 경험한 소년이 살아남아 사치분교의 기적을 여행자들에게 들려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치도가 바라다 보이는 한운리 갯벌과 독살

여인들의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다? 여근석과 남근석의 전설 

‘’큰마을’이라고 불리는 ‘대리(大里)’. 평범해 보이는 이 마을의 들녘에는 흥미롭게 생긴 바위가 하나 서 있다.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성기신앙의 상징인 ‘남근석’이 그것이다. 안좌면 대리의 남근석은 마을 맞은편 산에 있다는 여근석(여자 성기모양의 바위)과 얽힌 심상치 않은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주민들은 마을에서 마주보는 곳에 여근석이 있는 탓에 동네 아녀자들이 쉽게 정절을 버리고 바람이 난다고 믿었다. 이 때문에 여근석을 터부시 했고, 가정에 불운을 몰고 오는 이 해괴한 바위의 존재를 감추고자 그 주변에 소나무를 심었다. 또한 어느 누구도 그곳에서 나무를 베지 못하도록 채벌 금지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았던지 주민들은 곧 여근석을 마주보는 들판에 남근석을 세우기에 이른다. 남근석이 여인들의 부정을 막아주리라고 여긴 것이다. 남근석과 함께 다산을 상징하는 여근석이 다른 의미로 해석되는 부분이 이채롭다. 유교문화의 영향으로 여성의 성적 욕구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투영된 것은 아닌지 궁금해진다. 섬이라는 고유한 공간 속에서 과거 여성들의 일상은 어땠는지 여근석과 남근석에 얽힌 짤막한 전설은 시계를 거꾸로 되돌리며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대리의 남근석

겉치레를 하지 않는 안좌의 심장박동 소리 읍동 백제고분 

안좌도에서의 둘째 날. 여전히 바람이 매섭다. 중년이 된 사치분교의 작은 소년으로부터 배웅을 받으며 마지막 목적지인 읍동 백제 고분으로 향했다. 한동안 바다와 나란히 달리다보니 또다시 평야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번 여행의 끝점인 안좌종합고등학교를 찾았다. 학교 뒤편으로 난 길을 따라 모자를 깊게 눌러쓴 채 일행과 걷다보니 백제고분인 횡혈식 석실분이 나타났다. 대양으로 뻗어나 가는 요충지인 안좌도를 점령하기 위해 섬에서 일생을 보낸 백제 귀족 또는 토착세력의 무덤이다. 육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섬을 향한 역사 주체들의 관심과 욕망의 방증이겠다. 고립과 폐쇄의 이미지로 다가오는 섬을 소통과 확장의 공간으로 인식하는 시선. 오늘 날에는 움츠려든 다도해가 어쩌면 오래전 가능성으로 활짝 열린 공간은 아니었을지. 안좌도의 마지막 여행지를 둘러보며 천사의 심장으로 불리기 이전 물물교환의 중심으로서 제 역할을 해냈던 섬의 풍경을 떠올려보았다. 1박2일이라는 길지 않은 여정을 통해 ‘안좌도’라는 섬에 한 걸음 다가선 느낌이었다. 희뿌연 물안개 속에 잠긴 다도해의 첫 번째 섬, 신안군 안좌도. 땅을 소유하고자 하는 겉치레 섞이지 않은 순수한 욕망과 다양한 생활상을 간직한 안 좌사람들의 여운이 짙게 남았다. 

읍동 백제고분

신안 섬 운항시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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