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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 속으로, 나주에 서서 나주 영산포 <장군의 아들, 야인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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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에서 내리자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 영산포 등대 앞으로 펼쳐진 홍어의 거리에 도착했다. 흑산도에서 잡은 홍어가 이곳까지 오면서 저절로 삭았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영산포는 내륙 깊숙이 자리한 포구다. 사실 홍어의 주산지는 흑산도 근해이다. 하지만 나주 홍어를 찾는 데엔 이유가 있다. 흑산도에서 잡힌 홍어들이 배에 실려 영산강을 따라 일주일여를 올라와 옛 남 도의 물류거점이었던 영산포에 닻을 내리면 냉장시설이 없던 그 시절 어느새 홍어는 자연 발효 되어버리고 만다. 그 상한 맛이 독특한 맛을 연출하는 것이다. 이렇게 나주에는 홍어의 거리가 어엿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이 곳 나주의 인구는 14만 6천 여명, 그 중 일본인이 3400여명에 달했을 정도로 번화한 곳이었다. 그 발전을 짐작하게 하는 것이 바로 영산포 등대. 강에 무슨 등대인가 싶겠지만 등대가 어엿이 있다. 바다의 상징인 등대가 이곳 영산포에 서 있는 이유는 바로 나주 영화의 증거이다. 

영산포 홍어거리. 벌써 코가 알싸해진다. 

나주 영산포 등대는 우리나라 유일의 강변 등대로 1915년에 일본이 수위를 관측하기 위해 설치 했다. 영산포 선창은 1960년대까지 각종 선박이 왕래하면서 많은 수산물들이 유통 되었다. 특히 산 홍어와 추자 멸치젓배가 왕래해 지금도 선창가에는 어물전들이 남아서 그 옛날의 정취를 느끼게 한다. 

당시 영화 <장군의 아들>에서 종로 거리를 누비며 한국 상인을 지키는 김두한의 모습, 1900년 대 초반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이 영화의 배경이 된 무대가 바로 영산포구 일대이다. 비옥한 평야 가 많아 일제의 수탈현장이 되었던 나주에 여전히 60여 년 전의 흔적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근대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영산포등대 인근 영산동과 이창동에는 일본식 가옥이 몇 채 남아있다. 마을 안쪽으로 들어서자 어마어마한 저택이 나왔다. 일본식 건물인지 오래된 한국식 건물인지 긴가 민 가 했던 건물들 사이에서 단연 눈에 띄는 건물이었다. 일제 강점기 때 나주에서 제일 많은 농토를 보유했던 일본인 대지주 구로즈미 이타로(黑住猪太郞)의 저택이다. 1935년경에 지어졌다고 하는 데 청기와는 물론이고 모든 자재를 일본에서 운송해서 지었다고 전해진다. 전국을 시찰하다가 나 주평야를 보고 영산포에 정착하여 본격적으로 농지를 구입하여 임차농업을 시작한 그는 조선농회에 가입하여 농지확보에 나섰으며, 가마니회사, 창고 금융회사를 운영하여 부를 축적했다. 1930년대에는 무려 1,100여 정보의 농지를 소유한 대지주가 되는데, 이후로도 조선가마 니주식회사, 전남전기주식회사, 조선식산주식회사, 영산포 운수 창고회사를 경영하면서 나주지역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친 사람이었다고. 그때의 권력을 말하는 듯 집주변이 깨 끗하게 정리되어 있고 튼튼했다. 일본드라마에서 봤을법한 일본식 건물에 한껏 들떴지만 ‘실재’한 수탈의 증거라는 생각이 들자 소름이 끼쳤다.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받아낸 옛날 창고들이 줄지어 서 있다. 이곳에선 더는 사람의 기척이 들리지 않는다. 

그 외에 일본식 건물들은 대부분이 뜯기고 일제가 만든 문서 창고는 회사와 가정집으로 용도가 변하긴 했지만 몇몇 건물들은 붉은 벽돌건물 그대로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생 각보다 많지 않은 일본식 건물을 보고 주민들에게 일본식 건물은 어디에서 더 볼 수 있는지 여쭤보니 “거의 뜯어냈을걸?” 이라고 하신다. 가까이에 위치한 나주 영상 테마파크는 그 엄청난 돈을 투자해 새로 만들어낸 세트장이다. 하지만 당장의 불편함을 피하려고 문화유산을 철거했다니 관광자원의 손실뿐 아니라, 문화재의 손실까지 아쉬움을 이루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그곳 주민의 입장이 안 되어보면 알 수 없는 상황. 어쩌면 수탈의 흔적이 없어져버렸으면 싶었을 수도 있다. 

어질러진 나무 부스러기들 사이로 오래된 나무문들이 세워진 것을 보아 이곳에선 주로 문을 만들엇다 것 같다. 
오래된 건물들이 즐비하다. 이곳에서 영화가 쉬이 가늠이 안 된다.

수탈을 비롯한 나주 영화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지만 이제 한산한 거리에선 많은 사람 들이 오갔다는 것이 쉬이 상상되지 않는다. 을씨년스러운 영산포의 거리는 완벽하게 몰락했다는 표현이 와 닿을 정도로 영화라는 말과 상반된다. 1970년대 국토개발계획에 의한 영산강 하구언 건설이 원인이 됐다. 더불어 육로와 철로의 발달은 수운의 침체를 가져오게 하였던 것. 1975년 영산포에 배가 들어오지 않음으로써 영산포는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지금도 선창 부근은 그때의 모습을 그대 로 간직한 채 세월에 몸을 맡기고 있지만, 더 이상 들어오는 사람도, 나가는 사람도 없게 된 곳에서 남아있는 사람들의 허무함은 가늠할 수 없다. 인적도 드문 거리에서 오늘따라 안개도 자욱해 음산해 보이기까지 해 마음이 조금씩 불편해졌다. 

하지만 이곳에도 변화의 움직임이 조금씩 보인다. 숨통을 조였던 영산강하구언을 철거시키거나 재조정하여 수운을 살리려는 노력이 시작되고 있다. 나주시에서는 영산포의 선창을 다시 복원하는 ‘근대거리 조성계획’을 수립중이며 당당한 문화유산으로서 뒤늦게나마 재인식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가 갔을 때 때마침 일본식 지붕의 건물이 공사 중인 것을 보았다. 공사장 인부들에게 물어보니 박물관이 지어질 예정이 란다. 옛 것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지붕만 그대로 두고 많이 허술해진 건물의 외벽이 나 기둥을 다시 세우고 있다. 

촬영명소, 관광에 대해 다시 한 번 정의 내리게 되었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심상이 떠오르는 것이 관광의 목적이 아닐까. 자료조사를 하고 갔지만 기대한 것과는 달리 실상은 아름답지 않은 풍경, 폐허가 된 많은 집들, 음산한 창고들이 기다렸다. 하지만 영산포 거리, 그 속에는 역사가 있었다. 수탈 당한 민족의 한이 느껴졌고, 또 어쩌면 일본인들과 함께 어우러져있던 평범한 한국사람들의 모습도 아른거렸다. 우악스럽게 철판이 박혀 굳게 닫혀 있던 가정집들을 보며, 노인만 사는 곳, 더 이상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이곳이 아무도 모르는 채로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릴까 조바심도 났다. 나와는 상관없다 생각했던 역사의 흔적들이 마음을 통째로 흔들었다. 

영산포 등대 이외에도 나주경찰서, 노안천주교회 등 많은 곳이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수탈의 증거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이 곳 나주에 와본다면, 불편한 마음이 먼저 들 것이다. 하지만 아마 같은 마음으로 조바심을 느낄 것이다. 아직까지 같은 한국 땅 안에서도 지역색을 띠며 싸우는 사람들이 많다. 사소한 이유로 큰 것을 놓치지 않는 ‘우리’가 되길 바라며 심란한 마음을 안고 나주를 빠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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