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살고 있다’는 말이 세월에 빛바래지 않고 은은히 머무는 ‘대청’.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을 차례로 보내고 행복한 노을을 맞은 노년의 부부. 젊음이 지펴진 한 때보다 더 결 고은 사랑으로 서로를 아끼며 만두를 빚는 금빛 청춘들. 클래식을 즐겨 듣는 남편 창세 씨와 한지공예를 하는 아내 상례 씨. 어느덧 둘의 취미는 한 몸이 되어 있었다. 사람들의 발길이 편안하고 즐겁게 이어지는 부부의 대청을 찾아 야윈 마음을 ‘맛있는 늦둥이’로 살찌웠다.
목포 구도심에서 오래도록 만둣국 집을 운영해 오신 것 같은데 정확히 얼마나 되셨죠?
박창세 씨 : 올해로 딱 10년이 됐어요. 시작한지 5년 동안은 많이 힘들었어요. 그래서 그만둘까도 생각해 봤죠. 그런데 기도할 때마다 포기하지 말고 계속하라는 마음이 선명해지더군요. 덕분에 대청이 지금에 이를 수 있었어요.
대청이라는 이름이 평범한 것 같으면서도 특별하게 느껴져요.
박창세 씨 : 황해도식 만둣국을 팔기로마음먹으면서부터 커다란 마루의 이미지가 떠오르더군요. 그런데 일본말에도 둥근 것을 의미하는 ‘마루’가 있어 고민이 됐어요. 어느 날 서울에 올라갈 일이 생겼어요. 버스가 잠깐 휴게소에 멈췄는데 그곳에서 우연히 책 한 권을 발견하게 됐죠. 그 책 속에 ‘대청’이라는 단어가 나오더군요. 사람들은 대청에서 조상들께 제사를 지내고, 여럿이 둘러앉아 이야기도 나누잖아요. 대청이 간직한 그 의미가 마음에 와 닿았어요.
그러셨군요. 그럼 두 분께서는 어떤 계기로 황해도식 만둣국 집을 여시게 되셨죠?
박창세 씨 : 서울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후 목포로 내려왔어요. 아내는 응용미술과를 전공하고서 목포 정명여고 미술선생님을 지냈고요. 건축 일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나서 아내와 함께 한지 공예를 직업으로 삼아볼까 잠시 고민했었죠. 그런데 한지공예는 취미거리 밖에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몇 개월 쉬고 있는데 때마침 친구들이 집에 찾아왔어요. 만둣국을 끓여 대접했죠. 그랬더니 친구들이 만둣국이 참 맛있다면서 만둣국을 만들어 팔면 어떻겠느냐고 하더군요. 생각해보니 그것도 괜찮겠다 싶어 시작하게 됐어요.
전라도에서 황해도식 만둣국을 만들어 판다는 게 색다르게 느껴져요.
박창세 씨 : 제 고향은 원래 황해도에요. 6.25때 초도라는 섬으로 피난을 갔다가 군함을 타고 다시 목포로 내려왔어요. 이북이나 서울, 경기도 쪽 사람들은 명절만 되면 식사대용으로 만두를 빚어 먹어요. 떡국은 잘 안 먹죠. 명절 때나 생일 때 만두를 만들어 먹는 게 생활이죠. 귀한 손님이 왔을 때는 집안 식구들이 모두 둘러앉아 만두를 빚어요. 저녁에는 만둣국을 끓여 소박한 파티를 벌이죠. 우리 집사람은 전라도가 고향인데 결혼해서 줄곧 시부모님과 생활하면서 만둣국 끓이는 법을 자연스럽게 익히게 되었죠.
대청 만두는 다른 만두와 달리 만두피가 특별한 것 같아요. 색깔이 노르스름해요.
박창세 씨 : 황해도식 만두를 빚으면서도 자꾸 궁리를 했어요. 좀 더 맛깔스럽고 건강에 좋은 만둣국을 손님들께 대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러던 찰나 하루는 TV를 보는데 강황이 성인병에 좋다고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만두피를 반죽할 때 강황가루를 함께 넣게 됐어요. 그래서 만두피 색깔이 노르스름합니다.
그렇군요. 강황이 범인이었군요. 대청의 만둣국 국물도 진한 우유빛깔을 띄던데요.
박창세 씨 : 국물은 저희가 직접 우려낸 사골을 사용해요. 전라도에선 대게 소갈비를 구이나 찜으로 즐겨 먹잖아요. 황해도에선 흔히 갈비를 국으로 끓여 먹어요. 명절에는 갈빗국을 워낙 푸짐하게 끓여내다 보니 양껏 먹고도 솥에 많이 남거든요. 그래서 저녁에 만두를 빚어 남은 갈빗국에 넣고 끓여요. 그게 바로 황해도식 만둣국이에요.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에요. 삼겹살을 삶아서 두툼하게 썬 후 고춧가루와 파를 넣고 함께 버무리죠. 그렇게 양념된 삼겹살을 고명으로 얹으면 마침내 황해도식 만둣국이 탄생합니다. 대청을 열 당시에는 돼지고기를 고명으로 얹어 볼까도 고민했어요. 그런데 손님들이 기름진 걸 좋아하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살코기만 발라내 만두소를 담백하게 만들고 있어요.
대청식 만둣국은 보통 정성이 들어간 음식이 아닌 것 같아요. 먹는 저희야 즐겁지만 두 분께서는 힘드실 것 같은데 어떠세요?
김상례 씨 : 글쎄요. 일이 즐거워서 그런 지 오히려 힘이 나요. 다른 사람들은 우릴 보고 어떻게 그렇게 힘든 일을 하느냐고 걱정스레 묻지만, 저흰 기쁜 마음으로 이 일을 하기 때문에 피곤하지 않아요.
박창세 씨 : 일이 즐거우면 피곤하지 않아요. 그래서 자기 일을 즐겁게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죠. ‘내 일이 즐겁다’라고 생각하면 일을 해도 피곤하지 않고, 일도 술술 잘 풀리죠. 단순한 깨달음 같지만 일흔을 바라보는 저희 부부에겐 살면서 절실히 느껴온 부분이에요.
언제나 대청에 오면 클래식이 흐르더군요. 클래식과의 특별한 인연이 있으실 것 같은데요.
박창세 씨 : 서울로 고등학교를 진학하면서부터 팝송을 좋아하게 됐어요. 그러다 어느 날부턴가 만토반이라는 클래식 연주 악단에 빠져들게 됐죠. 총각 때 목포로 내려와 오거리에 있는 중앙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어요. 우연히 교회 목사님도 클래식을 즐겨 듣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그때만 해도 음향 기기들이 귀했는데, 목사님께서 월남전에 참전하시고 귀국하면서 엠프를 가져오신 거예요. 전 목사님께 교회에서 헨델의 메시아 전곡을 감상하면 어떻겠느냐고 말씀드렸죠. 목사님께서는 교인들뿐만 아니라, 목포 시내 청년들이 모두 감상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자고 하셨죠. 당시 아내는 같은 교회에 다니는 미술선생님이었어요. 그래서 아내에게 음악 감상회 포스터를 그려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러면서 연애도 시작했죠.(웃음)
그러셨군요. 클래식 감상모임이 두 분을 부부로 이어줬군요.
박창세, 김상례 씨 (환하게 웃으시는두 어르신)
대청에서 만두 빚으시랴 바쁘실 텐데 한지공예는 언제 하시는 거예요?
김상례 씨 (오후 3시부터 5시 사이)이런 시간에. 음식 준비가 끝나고 틈이 생기면 그때 한지공예도 하고, 천연염색도 해요. 예전엔 손님으로 오신 분들이 배우겠다고 하면 가르쳐주기도 했어요. 열정을 가지고 배운다면 지금도 무료로 한지공예를 가르쳐드릴 수 있어요. 그런데 시작은 하고 다들 끝을 못 맺더라고요. 지난 10년 동안 2단 장롱을 완성한 사람이 딱 두 명 나왔어요. 한지공예는 문양 오리는 게 힘들어요. 지금은 바깥어른이 문양을 대신 오려주세요.
박창세 씨 : 한지공예는 손이 많이 가요. 또 눈이 어두워지면 작업하는 게 힘들죠. 아내가 힘든 일을 도맡아 하는 게 싫어요. 한지공예든 만두소를 만드는 일이든 힘든 건 제가 대신 하려고 합니다.
두 분 사랑이 부럽네요. 그럼 언제까지 손님들께 황해도식 만둣국을 대접할 생각이세요?
박창세 씨 :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저는 내일 모레가 칠십이에요. 우리 둘 다 일흔이 멀지 않았죠. 하지만 적어도 10년은 더 일해야 할 나이라고 생각해요. 사람 일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지만 우린 날마다 큰 계획 속에서 건강하게 일하며 살아가야 하죠. 그래야 마음에 행복이 깃든다고 믿어요.
대청이라는 공간에서 두 분의 여생이 이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으신지.
박창세 씨ㆍ김상례 씨 : 우리 두 부부가 오랫동안 건강하게 대청을 운영하는 것. 그 이상은 바라는 게 없어요. 또 만둣국을 팔아 여유 돈이 생기면 어려운 이웃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