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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명왕성으로 가고 싶다 -민중작가, 하동(河童) 천승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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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면 명왕성이 되고 싶다. 
마지막 태양계 별로 이제는 쓸모가 없어져 쫓겨난 얼음별. 
그곳에서 지구돌과 얼음돌로 불을 피워 담배 한번 거하게 피어보고 싶다. 

그는 아팠다. 병들고 늙은 숫소 같았다. 능숙하게 담뱃불을 붙이고 한 모금 깊이 마시고 뱉어냈다. 담뱃불이 꺼지기 무섭게 다음 담배를 꺼내 물었다. 말이 느리고 한 마디 한 마디가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어느 누구보다 완고하고 명료하게 말했다. 문학에 대해서는 더욱 맑은 정신으로 말했다. 그는 우리 사회의 최하층 삶을 살면서 그들 곁에서 민중들의 애환을 담았다. 그래서 민중작가라 불리는 하동 천승세, 그를 만났다. 

많이 추우시죠. 

아니요. 담배를 피우면 추운지도 몰라요. 하루 5갑씩 피워서. 바로 앞에서 담배를 피워서 미안해요. 나는 하루에 커피와 담배 없으면 못 살아가요. 

몸이 많이 안 좋다고 들었어요. 지금은 괜찮으세요? 

작년에 크게 충격받은 일이 있어 몸이 많이 안 좋아요. 젊었을 때는 항상 65kg을 유지 했는데 23kg이나 빠졌어요. 약을 하나 먹고 있어요. 자각증세를 없애는 약이라고, 작 년 힘들었던 그때 생각을 안 하도록 먹는 약이지요. 그때는 사람이 싫어지고 만나기 가 싫더라고요. 그런데 사람이 싫어지면 문학을 못하는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문학이 라는 것이 사람 이야기인데. 그 약이 엄청 독해서 아예 창작 활동도 못 해요. 한 나라의 문인이라면 국어사전을 다 외워도 모자라는 판인데 지금은 자기 나라 말도 못 쓰고… 원. 약을 다 끊으면 그때 다시 창작 해볼까 해요. 그래도 내 또래에 비하면 건강한 편이에요. 머리도 안 빠지고 검버섯도 없는 게. 병원에서는 의료 임상학적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이렇게 멀쩡한 것은 돌아다니는 것은. 젊었을 때도 여기 목포에서 천승세한테 안 맞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강골이었어요. 몸은 어머니를 닮아 이 핏줄 하나까지 다 닮았어요. 

질문 많이 받아보셨죠? 어머니, 박화성씨에 대해 여쭤봐도 될까요. 

어머니는 내가 문학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어요. 다른 자식들은 공부도 잘하고 그러는데 나는 싸움 밖에 잘하는 것이 없으니. 하여튼 어머니는 내가 일기를 쓰고 있으면 무슨 연애편지를 쓰냐 할 정도로 문학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어요. 글 쓰는 당신 얼굴에 똥칠할까 염려되셨나 봐요. 어머니 살아계실 때, 내가 어머니 젖꼭지 한 번 먹어본 적이 없었어요. 그런 어머니가 제가 처음 ‘점례와 소’로 신춘문예 당선된 신문을 펼쳐 보시더니 어머니가 내 뒤를 돌아오셔서. 앞이 아닌, 뒤를 돌아서 내 아들 장하다. 이렇게 말씀했어요. 앞으로 안아주는 것도 아니고. 내 아들 장하구나. 뒷목덜미가 젖을 정도로 한참을 껴안으면서 눈물을 흘리셨어요. 그때 어머니는 이 기구한 자식이 애미 피를 받아서 문학하는구나 감격스러웠나 봐요. 어머니께서 나를 안아주시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는 하늘이 하나인 줄 알았어요. 그러나 어머니가 돌아가시니깐 그때 하늘이 두 개라는 것을 알았어요. 하나는 진짜 하늘, 하나는 나에게 문학의 피를 물려준 어머니. 내가 그 피를 받아 문학을 하고 있구나. 지금 여기 흐르는 내 피 반절이 어머니 박화성의 피입니다. 어머니가 88년도에 돌아가셨는데 꽃만 보면 지금도 어머니 생각이 나요. 어머니가 굉장히 꽃을 좋아하셨거든요. 

선생님 처음 문학은 소설이 아닌 시라고 들었어요. 

처음에는 원래 시인이 되고 싶어 시를 썼어요. 그런데 말이에요. 시는 정직성이 있어야 해요. 시에 지식이 개입이 들어가면 절대 안 돼요. 시적 의미와 시인의 사유가 그대로 들어가야 하는데 지식이 들어가면 갈수록 시는 조작돼요. 유식해지죠. 그 시대의 유행을 따라가거나 외국 시를 모방하거나 해서는 안되거든요. 그런데 계속 시에 지식이 개입되고 날조가 되어서 시를 못 썼어요. 그래서 소설 한 번 써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문학 얘기 좀 더 해주세요. 

그 후 58년도에 제가 소설로 처음 등단을 했어요. 당시 석간신문밖에 없었는데 57년 12월 31일 자에 다음 해 신춘문예 발표가 나왔어요. 57년 12월은 마침 누님이 아이를 낳아서 어머님이 자리를 비운 상태였지요. 12월 중순부터 한10일 동안 어머니가 없는 틈에 소설 ‘점례와 소’를 써서 보냈어요. 아시잖아요. 서울 겨울이 얼마나 추인지. 그 겨울 저녁에 밖에서 덜덜 떨면서 신문을 받았어요. 화투를 열듯 신문을 여니깐 딱 ‘점’ 자가 보이고 다시 열어 확인하니 ‘점례와 소’가 당선됐어요. 12월 15일 마감일에 넣어가지고. 어머니 없으니깐 마음 놓고 해보자고 한 것이.(활짝 웃는다) 그 이후로 단막극도 당선이 되고 희곡작가가 되어 보아야겠구나 하고 생각을 했어요. 그때는 이미 소설에 천승세라는 이름을 쓰고 있어서 가명으로 내었는데 희곡도 당선 되었지요. 그때 받은 상금이 100만 원이었는데, 그 당시로는 집 두 채를 살 수 있는 큰 돈이었어요. 그때 또 새싹문학이라는 어린이 잡지를 창간한 동료가 있었는데 나에게 글을 한 편 써 달라고 부탁이 들어왔어요. 그래서 어린이 동화도 등단이 되느냐 물어보니깐 그러면 더 좋다고 했어요. ‘앞만 보는 아빠’라는 제목으로 동화작가 등단 준비를 했지요. 이러면서 소설가, 극작가, 희곡가, 동화까지. 내가 이제 시까지 쓰면 되었지요. 89년도 겨울에 창작과 비평에서 내가 젊었을 때 시 쓴 줄 아니깐 시 10편만 써달라는 거예요. 계속 연락 오면서. 그때는 내가 만취하면 제자가 받아쓰는 그런 시절이었지. 그러면 내가 나를 시인으로 등단을 시켜주면 시를 쓰겠다고 했어요. 그러니깐 그쪽에서는 어떻게 그러느냐 선생님은 지금 문단 30주년되는 원로인데 어떻게 그러느냐 못 하겠다고 하니 편집회의 몇 번 하더니 그렇게 하기로 해주었어요. 해마다 신춘문예 떨어지는 사람이 수만명인데 나는 절대 그렇게 못한다 꼭 그렇게 해달라고 했지요. 나중에 시로도 발표하니깐 모두들 놀라 했어요. 실제 천승세 선생님이시냐 아니면 동명이인의 새로운 사람이냐. 문학과 비평 전화에 불이 났어요. 이렇게 정식 코스로 4가지 문학에 등단하던 사람이에요. 그래서 내가 늘하는 말이 신인의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저는 죽는 날까지 신인 정신으로 살고 싶어요. 내가 곧 60년 문단 인생이 됩니다. 나의 어머니도 문학 60년 인생을 넘기시고 돌아가셨고요. 죽고 나서도 다시 신인으로 태어나고 싶은데 여기서 내 문학은 끝나겠구나 생각을 하니… 이제 조금 문학을 알만한 나이에 죽는구나가 가장 아쉬워요. 

글을 쓰기 위해 원양어선을 타기도 했지요? 

내가 희곡을 위해 유서까지 걸고 참치어선을 탔어요. 주로 저는 농어촌 소설을 많이 썼는데 주변 연근해는 잘 알겠는데 원양은 모르겠는 거예요. 그래서 참치어선을 탔지요. 남양 어선은 몸 파는 여자도 있고 술도 있고 그러는데 저는 그 배에 타기가 싫더라고요. 그래서 북양 어선을 탔고 떠났죠. 그곳은 파도가 10미터까지 올라가고 자칫하면 허공에서 배가 두 동강나 순식간에 침몰해 버리는 곳이에요. 굉장히 무서워서 갈 엄두도 안 나는. 갈 때는 각서에 지장까지 찍고 갔어요. 사망 시 귀사에는 한 푼의 위자료 청구도 하지 않겠다. 다른 나라 같았으면 작가가 그 배에 탄다고 훈장을 받았을 텐데 그때는 반체제 작가라고 군사 정권 때 피해를 많이 받았어요. 제가 부산에서 배를 타고 다시 들어오는데 반 정부 글이라고 잡지에 연재를 못 하게 했어요. 천승세 글을 실으면 다 폐간해 버린다고. 총 4번을 옮겨 다녔는데 다 중단했어요. 그때는 신경리, 백난청, 고은 전부 다 반체제라고 억압 당했을 때니깐. 그때 내가 목숨을 걸고 8평 셋방에 5마리 자식을 두고 바다로 떠났어요. 그때 마누라 심정이 어떻겠어요. 그걸 생각을 하면 끔찍하죠. 어머니한테서 말도 못하고. 그때 38번 이사하면서 셋방살이를 했어요. 만선 쓸 때도 돈 없어 고구마 2개로 3주 동안 버텼고. 얼마나 가난했던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저는 배고프다고 누구한테 얻어먹지는 않아요. 죽으면 죽었지. 벌써 41년이 지나서 이제 그 희곡을 쓰고 싶어도 쓰고 싶지 않아요. 김 새버려서. 김대중 씨가 대통령 되면서 민주화가 제대로 시작되고 다시 쓸 수도 있었는데, 어디 받아 주는 잡지사가 있나. 잡지사가 처음부터 연재하고 싶어하지 누가 중간부터 실고싶겠어요. 그때 내가 출판사에 5천만 원을 빚졌어요. 내가 죽으면 아이들한테 애비가 못 갚은 돈 니들이 갚아라 해야지. 내가 죽으면 그렇게 유언을 남기고 싶어요. 

요새 사람들이 지역을 떠나 서울로 올라가잖아요. 문학하는 사람들까지. 선생님이 보시기에 이곳 문학, 어떻나요. 

목포에서 제자 한 명을 키워볼까 했는데 모두 다 전멸했어요. 전부 서울로만 올라가고 남아 있는 이들은 전부 취미로 교양강좌로 문학을 하고 있고. 목포가 아까워. 아까워. 요새 못된 잡지들도 많지. 돈만 받으면 모두 등단을 시켜줘요. 지금 남도에서 문인들만 몇만 명이에요? 지금 보면 문인보다는 동아리 개념이지. 문학만큼은 문학정신으로 제대로 해야 하는데. 전국에 있는 각 지부마다 문인, 문학이라고 하니. 문학 할려면 독창성이 있어야 하는데 문예 자격도 없는 사람들이 다들 문학을 한다고. 이놈의 성질이 잔머리 굴리지를 못해요. 잔머리를 굴려야 행복하게 좀 살텐데. 내가 사실 이 병이 외로워서 생긴 병이에요. 요즘 문인이 문인 같은 사람이 없고. 중학교 문예부장도 못 하는 사람이 주인이나 되려고 하고. 아주 나를 몰아내려고 난리에요. 그 놈들을 성격 같으면 주먹으로 때려죽여도 시원치 않는데 참아요. 나는 어머니의 자식이고 문학하는 놈이니깐. 이 분을 참으려면 그 약을 안 먹을 수가 없어요. 옛날 예술혼을 생각하면 아주 기가 막혀요. 문학이 아니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람이 문학을 해야 하는데. 재주 있는 사람들은 다 서울로 올라가고 이제 목포라고 하면 문학적으로 치부하지도 않는데 억울해서 어떻게 삽니까. 생각하면 기가 막혀서 말이 다 안 나옵니다. (깊은 한숨과 담배 연기를 뱉는다.)•••••

지금까지 글을 쓰면서, 아끼거나 사연 깊은 작품이 따로 있나요. 

‘혜자의 눈꽃’은 말이오. 이 소설은 시 같은 소설이 없을까, 소설 같은 시가 없을까 고민하다 썼어요. 65장을 써서 문학사상에 발표한 작품이요. 이 소설에는 아주 지독하게 깊은 사연이 있어요. 원래 혜자 엄마라는 사람은 외눈박이이에요. 플라스틱으로 눈알을 넣고 다니다 죽은 사람이요. 혜자네 집은 원래 우이동에서 제일 가난했던 집인데 그때 전깃불 사용하던 시기에도 석유램프, 촛불로 살았던 판잣집이었죠. 제가 그 부근에서 셋방을 얻어 들어가 있었어요. 혜자 엄마 눈은 남편에게 맞아서 그렇게 됐어요. 남편이 젊은 주모와 바람나니깐 대들다가 맞았겠죠. 그때 혜자 할머니가 말하더라고요. 사람 눈알이 그렇게 크고 힘줄에 달랑달랑거리던지. 근데 그 튀어나온 눈알을 남편이 밟아버렸어요. 이 얼마나 사건이 소설같이 절절해요. 소설에는 사건이 많고 다양한 상황이 많을수록 좋은데 모든 것을 쳐내고 제일 미학적인 의미만 담았어요. 다른 사람 같은 경우면 중편이 되어도 모자란 소재였는데 제 소원인 시 같은 소설을 쓰고 싶어 함축해서 쓴 작품입니다. 그래서 혜자의 눈꽃은 내가 제일 아끼는 작품입니다. 

스승이었던 김동리 작가는 어땠나요. 

김동리 작가는 나의 스승이었으나 직접 나에게 사사해본 적은 없어요. 내 작품에서 이렇게 써라, 이렇게 해라, 이런 건 우리 어머니도 해본 적이 없고. 문학작품에서는 김동리 선생님은 최고예요. 내가 제일 존경하는 작가이고 스승이고. 그런데 그분은 좋게 말하면 국가주의자 쉽게 말하면 보수주의가 강한 사람이에요. 좌파를 굉장히 싫어하고 사상과 정신적으로 우파에 속하시던 분입니다. 저하고는 전혀 다른 사상을 가지고 있던 철저한 우파셨죠. 그래서 김동리 선생님이 심사한 것 중 다들 천승세가 받아야 했던 상도 3개나 못 받았어요. 그 정도로 내 소설이 좌파에 속하고 황구의 비명 같은 소설은 철저한 반미주의 이러니깐. 사상적으로는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문학적으로는 훌륭하고 존경하는 사람입니다. 그래도 내 첫 번째 작품집 후기에는 김동리 선생님이 나를 비상한 천재라고 써주셨습니다. 내 성격이 한번 마음에 들면 끝까지 변하지 않는 거. 나에게 김동리 선생님이 그렇습니다. 

인터뷰 오기 전, 여기 있는 서점은 다 뒤졌는데 선생님 책을 구하지 못했어요. 

내가 다 절판을 했어요. 저는 재판(再版) 하는 것을 싫어해요. 요새 재판 하려면 자기 돈을 내야 해요. 인세라는 것이 따로 없어요. 다들 자기 돈으로 찍어야 하고. 첫 작품은 6천 부를 뽑았어요. 그때 다시 재판하자고 말이 들어왔는데 내가 육천 명이 나 내 책을 읽었으면 고마운 거지 왜 더 뽑느냐고 했어요. 그때 내가 쓴 ‘황구의 비명’ 과 황석영의 ‘객지’가 제일 잘 팔렸을 때니깐. 특히 ‘황구의 비명’은 당시 운동권 학생들의 필독도서였어요. 만석처럼. 

가장 아끼는 후배가 있나요. 

김승옥과 황석영이요. 승옥이는 아까운 놈이에요. 후배 중에서 제일 쓸만한 놈이라 생각을 했는데 예수교로 잘못 빠져서. 종교에 깊이 빠지면 소설을 쓰지 못해요. 소설에는 선악이 서로 공존해야 하는데 종교에 빠지면 선밖에 쓸 수 없어요. 종교에서 위안과 위로를 받으면 좋은데 승옥이는 맹신적으로 종교에 빠졌어요. 하는 말이 새벽 몇 시가 되면 하느님하고 꼭 만난다고. 그래서 하느님하고 둘이 손을 마주하고 꼭 헤어진다고 하더라고요. 승옥이가 소설 하나는 기가 막혔는데 아까운 후배예요. 

마지막으로 후배 작가들에게 할 말이 있다면 

그야말로 신인 정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문학이라는 것에는 완성이 없습니다. 나는 원로라는 말을 싫어해요. 원로라는 말만 들으면 마치 다 끝난 거처럼 말해요. 문학의 경지에나 오른 거처럼. 그러나 나는 지금 죽어도 다시 신인으로 태어나고 싶어요. 문학은 결코 취미가 아니에요. 운명적인 일이지. 문학 할 사람이 문학해야 한다는 말이에요. 문학은 인간학이에요. 사람 사는 세상의 이야기. 슬프고 기뻐서 하는 것 랍니다. 이렇게 물질적으로 처세적으로 살아서는 안 되고 신인의 정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천승세 선생님은 여기 앞에서 순댓국 한 그릇 사줄 테니 먹고가라고 했다. 주문과 동시에 반찬과 술잔이 나왔다. 그리고 그는 내 앞에 놓인 잔에 소주를 직접 채워주며 자신은 평생 술 없이는 못 살았다며 단숨에 소주를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소주는 달고 달았다. 취기로 후끈해진 순댓집에서 그는 명왕성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실용과 쓸모가 없어져 세상으로 내던져진 명왕성이 되고 싶다고 했다. 세상살이 마음 졸이며 살았던 지구에서 지구돌 하나 들고와 퇴출당한 얼음별에서 얼음돌과 부싯돌을 키워 담배 한번 거하게 피워보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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