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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 예찬 순천 ‘형설서점’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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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기사에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이야기를 적어볼까 한다. 나이가 들수록 심심할 때 나와 놀아주는 사람은 적어지 는 법이다. 일가친척 하나 없는 먼 타지에서 대학생활을 보낸 나는 종종 주말과 수업없는 평일에는 인근 책방거리를 어슬렁거렸다. 이유는 없었다. 그저 책이 탑처럼 쌓여있는 골목의 풍경은 이국에 온 것처럼 낯설면서도 흥미로웠다. 흙냄새나는 오래된 골목길에 위치한 헌책방은 주머니 속 왕복 버스비만으로도 나를 여행자로 만들어 주었다. 


꿈틀대는 나의 놀이터 헌책방

헌책방은 참으로 지식이 없는 나에게 참을 수 없는 기쁨을 주었다. 고서적의 초본을 발견하는 행운을 얻는다든가 좋아하는 작가의 초기 작품집을 발견하기도 하였다. 또는 오래되어 물기 하나없이 바싹 말라 원래 모습은 찾을 수 없는 나뭇잎을, 짓궂은 남학생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성인잡지와, 연인 혹은 친구의 편지가 담긴 사연 있는 책을 발견하기도 하였다. 그곳에서 책은 주인을 바꾸어가며 모르는 사람의 수중에 들어가고, 또 모르는 세상의 모르는 사람 손으로 건너갔다. 

그렇게 책 속에 파묻혀 보낸 시절은 나만의 밀실에 들어온 듯하였다. 헌책방은 나에게 또다른 세계였고 놀이터이자 자궁같은 아늑함이 있었다. 그 당시 출석만 부르고 강의실을 나와도, 성적표에는 F가 남발을 하여도, 친구들은 토익, 어학연수, 대기업 인턴 등 스펙 올리기에 열을 다할 때 나는 이해하기도 어려운 철학서, 소설책을 읽으며 남들과 다르다는 생각으로 버티던 시간이었다. 

그럼 그렇게 무식하게 책을 읽어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이 되었을까. 결코 아니다. 밤새 도서관에 기거하며 책을 읽은 적이 없고, 불의를 보면 전보다 더 잘 참는다. 기분이 안 좋아도 상대방을 반갑게 대하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며 가식이 늘었다. 여전히 나는 허영에 가득찬 사람이다. 

푸르게 타오르던 젊은 시절, 나를 지탱한 건 그때 헌책방에 더미로 쌓인 책들이었다. 그곳은 어릴 적 보물찾기로 설레던 소풍놀이처럼, 먼지가 가득 묻은 책들 속에 보물쪽지가 숨겨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서서히 일상을 껴안으며 나는 헌책방에서 본능적으로 책과의 연애를 시작했다. 


진짜 책은 헌책방에 있다. 순천 형설서점

“저기가 전남에서 제일 유명한 헌책방이야. 겉은 별로 안 커 보이잖 아? 들어가면 엄청 깊어. 오래된 고서들도 많고. 잘 만하면 돈 벌어간다 니깐.” 

얼마 전, 순천 시내를 지나다 지인이 내게 한 말이었다. 당시 그 친구는 내 옆에서 스치듯 말했지만, 나는 그때 그 말을 흘려듣지 않고 두고두고 순천 형설서점을 기억해 두었다. 

입이 딱 벌어 질만큼 형설서점은 입구부터 책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어느 헌책방이 그렇듯이 형설서점 구조도 사람이 아니라 책 위주로 되어 있었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책이 빽빽하게 들어차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은 고작해야 30센티미터 정도이다. 체격이 큰 사람은 서가 사 이로 걸어 다닐 수도 없다. 

바깥에서 보기에는 건물이 10평 남직할까. 내부로 들어가니 개미굴처럼 그 깊이가 끝없다. 그 내부가 독특하여 직원에게 물어보니 옛날에 식료품 마트로 쓰이던 건물이란다. 주인이 30년 동안 이곳에 머물면서 책을 모았다. 

“순천에서 이 많은 책들이 다 소비가 돼요?” 

“순천에서 다 충당은 못 하고요. 보통 인터넷으로 주문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인터넷으로 책 주문이 많이 들어와 직원들은 주문을 처리하는데 바빠 보인다. 새 책을 파는 서점처럼 정리가 잘 되어 있지 않은데 직원들은 어떻게 책을 찾을까 궁금해진다. 여기저기 쌓여 있는 책을 매번 들어다놨다하는 중노동으로 웬만큼 체력이 좋지 않으면 못할 듯싶다. 

평일이라 그런지 형설서점을 방문하는 사람의 수가 많지 않다. 책더 미 속에서 간만에 나는 보물찾기를 했다. 다른 대도시처럼 책 순환이 잘되지 않는 듯하다. 드문드문 고등학교 졸업앨범이라든가 면사무소 의 전화번호부 같은 생뚱맞은 책들도 보인다. 어릴 적 아이들에게 보여 주었던 책들은 이제는 필요가 없어 내놓고, 시험에 합격했는지 불합격 했는지 알 수 없는 수험생의 손때 묻은 서적과 참고서들도 보인다. 

보물찾기를 끝내고, 소설 5권 비소설 3권 시집 2권, 모두 10권을 계 산대에 올려놓았다. 합계 3만 9천 원이 나왔다. 채 4만 원도 안 되는 금 액이다. 일반 서점이면 4만 원으로 채 4권도 못사는 금액이다. 빳빳한 잉크냄새 대신 사람의 손때가 누렇게 바랜 헌책을 가슴에 안고 흡족한 마음으로 형설서점을 떠났다. 

여전히 나는 쾌적하고 세련된 대형 서점보다 오래된 골목에서 쾌쾌한 곰팡이 냄새가 나는 헌책방에 먼저 눈길이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소풍놀이 아이처럼 설렘과 기쁨을 얻어갈 것이다. 아마 앞으로도 나의 헌책방 예찬은 아주 오랫동안 지속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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